이성원 전 통일부 과장
근래 북한의 중대 제안, 이산가족 상봉 무조건 제안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을 보면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남북은 오는 20~25일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하기로 5일 합의했지만, 그 과정의 우여곡절을 보면서 북쪽뿐 아니라 우리 정부의 태도에도 짚어야 할 점이 드러났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정체된 남북관계 해소를 위해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제시하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 속에 이 글을 쓴다. 필자는 통일부에 오랫동안 근무했으며, 2000년 이후엔 남북회담, 이산가족 상봉 행사, 남북공동행사 지원 등을 위해 수십 차례 북을 다녀왔다. 북한의 관료·민간인들과 10여년간 접촉 과정에서 알아낸 북한의 속내를 담은 책(<그래도 우린 다시 만나야 한다>)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우리 시각에서 보면 반세기 이상 헤어져 살다 어쩌면 이 생에 단 한 번 만난다는 인도적 차원의 일이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체제 안정에 큰 위해가 됨을 감수하면서 남쪽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자신들만의 방식대로 살아오던 ‘은둔의 왕국’을 개방한다는 두려움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임을 알아야 한다. 상봉 가족들을 통해 남쪽의 자유로움과 풍요로움이 직접 전달된다는 사실을 북한 정권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18차례 열렸는데 이를 전후해 항상 쌀·비료 등 인도적 지원 물품이 북에 전달됐다. 비록 남북간에 명시적 합의는 없었지만 북의 결단에 대한 보상 차원이랄까, 관례적으로 지원이 되다 보니 북에서도 당연히 식량 지원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됐다.(다만 이명박 정부 때 두 차례 상봉 행사에서는 대북 지원이 없었다. 어쩌면 북은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번 북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 제안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은 상대방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너무 순진한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일방적으로 상봉 행사 날짜를 정하고 실무 접촉을 요구한 우리의 행동을 보면서 북한은 서운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아마도 북쪽은 자신들의 제안에 우리 쪽이 적십자회담 개최로 화답하면서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의 일들을 청산하고 이산가족 문제를 포함해 전반적인 남북관계의 복원을 논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사업, 나아가 북한 핵문제 등 모든 남북간 문제에서는 자신들의 관점만으로 문제를 바라보며 해결되기를 원하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부족함이 갈등을 낳는 원인이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누가 먼저 마음을 열고 손을 내미느냐다. ‘없는 사람이 더 자존심이 강하다’는 평범한 말을 생각하면서 남북관계에서도 더 여유 있고 강한 우리가 가난하고 자존심 강한 북을 끌어안아야 한다. 이것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첫 단추를 끼우는 길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한반도 통일 환경은 어떤 측면에서는 분단 이후 가장 우리 민족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본다. 국제사회에서 주요 2개국(G2)으로의 부상을 위해 노력하는 중국, 자신들의 위상 제고를 위해 군사 대국화를 꾀하는 일본, 국내 정치·경제 문제에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 미국, 러시아의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서 남북이 힘을 합쳐 지혜롭게 대처한다면 한반도 문제 이니셔티브를 우리 민족이 쥘 수 있다고 보며, 민족의 통합도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30~40배 정도나 되는 북과의 국력 차이를 감안한다면 우리가 능동적으로 남북 문제를 주도하면서 민족의 꿈을 함께 개척해 나가야 한다. 북의 제안을 진정성 운운하며 따지지 말고 흔쾌히 받아들이고 새해에는 남북관계가 제2의 도약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성원 전 통일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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