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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싱크탱크 시각] 한국 정책사의 일대(?) 사건 / 이창곤

등록 2014-02-09 18:33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다시 선거다. 오는 6월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7월엔 ‘미니 총선’ 격인 재보궐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한 해 걸러 2016년에는 국회의원 총선이 있고, 이듬해엔 어느덧 또 대선이다. 2012년의 기억이 가시지 않았는데 크고 작은 선거가 줄줄이 예정돼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하지만 어째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세칭 선거 전문가들이 이맘때면 자주 쓰는 표현이 있다. “선거는 구도와 인물, 정책이다.” 이 세 요소가 짜임새있게 잘 맞아떨어져야 선거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나름의 경험칙이다.

나는 세 요소 가운데 특히 정책을 강조해왔다. 정치공학으로 보면 인물과 구도가 더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정당정치가 성숙하고 우리 사회가 실질적으로 좋아지려면 유권자의 선택 기준은 모름지기 정책과 가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런 단순소박한 생각에서 ‘정책선거’ 또는 ‘정책정치’가 조성될 수 있도록 나름대로 애를 써왔다. 누군가 ‘정책, 그까짓거’라는 식의 정책무용론 또는 회의론을 펼치면, ‘그래도 정책선거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를 설파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가오는 선거 시기에도 예전처럼 정책선거를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정책공약에 대한 유권자들의 신뢰가 2012년 대선을 계기로 숫제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왜? 대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내세운 핵심 정책공약은 복지와 경제민주화였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완화하고 이 나라를 복지국가로 나아가게 할 중요한 정책방향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아는 대로 집권 이래 주요 복지정책 공약인 4대 중증질환과 기초연금 공약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경제민주화는 아예 사라져버렸다. 한마디로 복지와 경제민주화 공약은 표를 얻기 위한 집권용 도구일 뿐이었다. ‘대국민 사기극’이란 격렬한 표현까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책선거와 정책정치는 각 후보와 정당 간의 정책적 차별성, 정책지향의 진정성과 일관성이 존재할 때 진정 의미를 띤다. 자신의 이념·가치와는 달라도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면 무조건 내 것으로 삼아 외치고, 감당 못 할 일이라도 권력과 자리를 차지한 뒤 번복하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정책이 채택되고 폐기 또는 수정된다면 정책선거와 정책정치는 무망하다. 이런 행태는 단순히 그런 정당 및 지도자에 대한 불신에 그치지 않는다. 정책공약과 정책정치에 대한 총체적 불신으로 이어진다. 이렇다 보니 후보가 살아온 이력 말고는 믿을 게 하나도 없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정책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기제라는 점에서 정책불신의 상황은 통탄스런 일이다. 정치와 정책에 대한 신뢰 없이 성공적인 정치사회 개혁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게 정치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정치가 좋은 정책을 갖추고 있을 때의 말이다. 좋은 정책 없이 좋은 정치란 없다. 좋은 정책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것은 선거 등 민주적 과정과 절차를 통해 치열하게 고민되고 갈등하고 상상됨으로써 이뤄진다. 지지 또는 거부라는 유권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주조되고 발전된다. 하지만 유권자들의 정책불신은 정치가 정책을 경시하게 하며, 궁극에는 보수적 세력과 관료집단의 정책적 독점력을 강화하는 토양이 될 것이다. 한 사회의 정책형성이 청와대와 관료집단의 폐쇄회로 안에서 이뤄질 때 나타나는 폐해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확인했고, 지금도 충분히 목도하고 있다. 배제와 불통, 불신의 정책정치 속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기대하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이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정책공약 불이행은 그 크기와 파장 면에서 한국 정책사에서 정책공약 불신을 가져온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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