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도서의 분류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다소 딱딱한 내용이 될 것 같아 미리 양해를 구한다. 근처에 책이 있는 분은 살펴봐 주기를 부탁드린다. 대개 책의 뒤표지 하단에는 ISBN(International Standard Book Number)이 있다. 이를 A라고 하자. A는 전세계의 출판사에서 펴낸 모든 책을 컴퓨터로 식별하기 위해 붙인 번호다. 각각의 책은 고유의 번호를 가진다. A 위쪽에는 바코드가 있다. 바코드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왼쪽 하단에 있는 숫자가 A, 오른쪽 상단에 있는 숫자가 ‘부가기호’(이를 B라고 하자)다. 모든 도서는 A에 B를 덧붙여 인식한다. 이때 A는 컴퓨터에서 자동으로 생성되고 B는 출판사가 직접 부여한다고 보면 이해가 빠르겠다.
나는 10년이 넘도록 도서를 구분해 왔지만 요즘처럼 B가 불명확한 시절을 겪기도 처음이다. B는 다섯 자리의 숫자로 구성된다. 이 중 맨 앞자리(제1행)에 0을 붙일 거냐 1을 붙일 거냐를 두고 문제가 불거졌다.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의 설명을 옮겨보겠다. 0(교양), “일반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주로 전문적인 내용을 비전공 일반 독자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풀어쓴 교양도서.” 1(실용), “주로 실무에 관계된 실용적인 내용의 도서,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도서, 수험서적.”
현행 도서정가제에 따르면, 발행일로부터 18개월이 지나지 않은 책은 19% 이상 할인할 수 없다. 단 실용서는 제외다. 애당초 실용서만 열외가 된 과정도 미심쩍지만 규정이 그렇다. 그럼 어떤 책이 실용서일까. 공정거래위원회가 정한바 “부가기호 제1행이 ‘1’인 간행물”을 말한다. 단순하고 모호한 정의다. 되풀이하지만 부가기호 제1행은 출판사가 정한다. 이쯤에서 누가 “에이, 그렇다고 출판사들이 아무 책에나 마구잡이로 ‘1’을 붙이겠어”라고 반문해줬으면 좋겠다. 마구잡이까지는 아니지만 셜록 홈스가 활약하는 추리소설이 실용서로 분류된 것을 나는 납득할 수 없다. 해당 도서는 출간과 동시에 인터넷 서점에서 반값에 팔리고 있다. 지난 1월에 출간된 문학평론가 정여울씨의 “초감성 에세이”는 7780원이 할인된 가격에 팔린다. 실용서로 분류됐으며 이 글을 쓰는 현재 인터넷 교보문고 주간 베스트 1위에 올라 있다. 나는 이 책을 동네서점에서 정가에 샀다.
내가 책 만드는 일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가운데 하나는 “건국 이래 좋아진 적이 없는 출판계”였다. 실제로 도서 시장은 점점 첨단 기기들에 잠식당했고 출판 인력의 고용은 불안정해졌으며 동네서점은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출판사들은 세계문학이든 하버드 관련 책이든 돈이 되겠다 싶으면 앞다투어 뛰어들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얼마나 많이 할인해서 팔 것인가’를 두고 서로서로 경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책이 더 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돈을 쏟아붓는 상황이 된 것이다. ‘출간 즉시 마일리지 지급’이 관행이 되었고, 교양에 가까워 보이지만 실용으로 분류된 책에는 쿠폰이 붙었다.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처음부터 ‘제대로 된’ 가격에 책을 팔았더라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출판사가 앞장서서 할인하지 않고 책을 팔면 어떨까. 아니,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이름 모를 동네서점 사장님과 그 서점에서 책을 산 독자들에게 사과하는 것 정도다. 미안할 따름이다. 아울러 교양으로 읽어도 근사하고 실용으로 읽어도 무방해 보이는 정여울씨의 책을 딱 꼬집어 거론한 일도. 정중하게 사과하고 싶다.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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