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 대중문화평론가
판결문을 읽어봤다. 며칠 전 무죄를 선고받은 강기훈씨에 대한 판결문이다. 23년 전 강씨가, 김기설씨 유서대필 혐의로 구속됐을 때 당시 법조기자였던 내게, 강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1, 2심 판결문은 커다란 의문부호를 던졌다. ‘이런 증거로 유죄를 선고할 수 있는 건가?’ 직접증거는 필적감정 하나인데, 그 감정 자체도 논란에 휩싸여 있었다. 언론사, 변호인단에서 했던 감정 결과가 검찰이 내민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감정 결과와 달랐다. 나머지는 강씨와 운동단체에서 제출한 필적 증거들이 조작됐네 아니네 하는, 설사 조작됐다 하더라도 강씨가 유서를 대필했다는 증거로 이어지기까지에는 많은 추론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판결문은 검찰 공소장과 마찬가지로 그 추론의 다리를 과감히 건너 유죄의 근거로 끌어들였다. ‘김씨가 남긴 유서의 필적이 강씨의 필적과 같다 - 강씨 쪽에서 김씨의 것이라며 제출한 수첩의 필적이 유서의 필적과 같다 - 수첩이 김씨 것이면 유서를 김씨가 썼다는 증거가 되겠지만 수첩이 조작된 의혹이 있다 - 수첩 필적은 강씨의 필적과도 같으니 수첩은 강씨가 조작한 거다 - 강씨가 유서를 대필한 게 맞다.’ 강씨가 언제 어떻게 수첩을 조작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1심 선고 뒤 국과수의 이 사건 감정인이 다른 사건에서 뇌물을 받고 허위감정한 혐의로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유죄를 선고한 2심 판결문은 이런 추론을 더 밀고 갔다. ‘김씨가 남긴 유서의 내용이 불효에 대한 사과와 장례 문제를 전민련에 맡기라는 내용뿐이라는 점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남긴 것으로 보기 힘들다’거나, ‘일반적으로 자살을 앞두고 망설이게 마련인데 김씨는 자살하겠다고 말한 날을 지켜 그대로 감행했다는 데서 자살에 다른 사람이 관련돼 있음을 추론하기 어렵지 않다’고 했다. 내 궁금증은 이거였다. 이런 추론이 ‘의심이 갈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재판의 대전제에 맞는 건가?
무죄를 선고한 최근의 판결문은 우선 유서의 필적은 김씨의 필적과 같고 강씨의 필적과 다르다고 판단했다. 그러고 나니까 1, 2심에서 끌어들인 다른 모든 추론들이 무너졌다. ‘수첩을 조작했다면 여러색의 필기구를 쓰고 그걸 또 지우기까지 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 또 수첩의 필적은 유서와 동일하고 강씨의 필적과 다르다 - 그러니 설사 수첩이 조작됐다 하더라도 강씨가 조작한 것은 아니다.’ 판결문은 김씨가 쓴 다른 편지의 내용, 문장력, 표현력 등을 고려할 때 검찰 주장처럼 “김씨가 이 사건 유서를 작성할 문장력이나 표현력이 없었다거나 부족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라고도 했다.
예단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필적감정 하나가 엎어지니까, 다른 추론들은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거나, 거꾸로 피고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무죄 판결문을 읽으니 어딘가 허망했다. 애당초 의문부호를 가질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쉽게 말해, 그렇게 수사하고 재판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허약한 물증 위에 추론을 쌓고 쌓아 유죄를 선고하면 안 되는 거였다.
강씨 사건이 재심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법원이 그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부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 위원회는 이제 없다. 이 사건처럼 추론이 유죄의 근거로 작용했을 때는 반대 증거를 들이밀기도 쉽지가 않다. 강기훈씨 사건 수사 및 재판 관련자에게 형사책임을 묻기도 쉽지 않을 거다. 단 한명, 국과수 감정인이 2심에서 위증했음이 드러났는데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다. 이런 일이 또 터지면 어떻게 하나. 무죄 판결문은 또 다른 의문부호를 들이민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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