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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혁명은 n분의 1 / 박권일

등록 2014-02-24 18:33

박권일 칼럼니스트
박권일 칼럼니스트
올해 초 <시사인(IN)>에서 어떤 여성의 편지를 읽었다. 쌍용자동차와 경찰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노조가 47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펜을 들었다고 했다. “47억원…. 뭐 듣도 보도 못한 돈이라 여러 번 계산기를 두들겨봤더니 4만7000원씩 10만명이면 되더라고요. 법원에 일시불로 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우선 이 돈 4만7000원부터 내주실 수 있나요? 나머지 9만9999명분은 제가 또 틈틈이 보내드리든가 다른 9만9999명이 계시길 희망할 뿐입니다.” 편지의 주인공 배춘환씨는 “일하는 남편의 아내로서, 애 키우는 엄마로서,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여자로서 보낸 돈”이라며 4만7000원을 봉투에 넣어 편지와 함께 보냈다.

뭉클한 미담이었다. ‘그래, 저런 분들이 아직 계시는구나.’ 그러고는 한동안 잊었다. 그사이 배춘환씨의 4만7000원은 기적이 되어 있었다. 편지를 읽은 많은 이들이 4만7000원과 편지를 보내며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잡고’라는 이름으로 시민사회기구가 출범했다.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생존을 위협받는 노동자와 가족들에 대한 지원모금도 시작됐다. 이름하여 ‘노란봉투’ 프로젝트다. 2014년 4월30일까지 4억7000만원을 모으는 게 목표다. 제주도에서도 편지가 날아왔다. 발신인은 가수 이효리씨였다. 손글씨로 적힌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지난 몇년간 해고노동자들의 힘겨운 싸움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잘 해결되길 바랄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제 뜻과 달리 해석되어 세간에 오르내리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효리씨는 “하지만 한 아이 엄마의 편지가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며 동참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함께 온 봉투에는 4만7000원이 들어 있었다. 이효리씨의 편지 이후 모금액은 순식간에 2억원을 돌파했고 2월22일 현재 모금액은 3억8000여만원, 목표액의 80%를 훌쩍 넘겼다.

이효리씨 정도로 성공한 연예인이면 4만7000원이 아니라 100만원도 보낼 수 있었을 테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불씨를 댕긴 배춘환씨 역시 4만7000원이 아니라 5만원 또는 10만원을 보낼 수 있었는데도 굳이 4만7000원이란 숫자를 맞추어 봉투에 담았다. 배춘환씨가 제안한 ‘10만명이 4만7000원씩 내기’는 얼핏 너무 순박한 발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곱씹을수록 탁월한 제안이다. 그것은 쌍용차 노조 손배가압류 금액을 해소하는 효과적인 방식일 뿐 아니라 자본으로 환산될 수 없는 사회적 참여와 연대의 가치, 곧 공공성을 북돋는 실천이다. 나아가 돈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찍어 누르고 질식시키는, 그래서 모두가 자본의 권능 앞에 ‘알아서 기게’ 만드는 시대를 향한 상징적 항의이기도 하다.

‘자본의 논리’(1원1표제)는 ‘평등의 논리’(1인1표제)를 겉으로 인정하면서 뒤에서 냉소한다.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다 알면서 왜 순진한 척하느냐고 능글맞게 눙친다. 확실히 오늘날 평등의 논리는 자본의 논리보다 무력할지 모른다. 그러나 평등의 논리가 지닌 진정한 위력은 그 압도적인 자본권력조차 ‘겉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나온다. 노동자 역시 이름과 얼굴과 가족이 있는 한 명의 인간들이라는 것, ‘n분의 1’의 존재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걸 배춘환씨는 한 장의 편지로 새삼 일깨웠다. 4만7000원의 제안은 다른 것도 아닌 돈을 매개로 사람들에게 평등의 논리를 스며들듯 납득시키는 놀라운 마법을 보여주었다. 노동자에 대한 무차별적 손배가압류가 사회문제가 된 지도 오래되었다. 손배가압류의 족쇄, 이번엔 정말로 끝장내야 한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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