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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비밀 없는 세상 / 이유진

등록 2014-03-09 19:10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유진 문화부 기자
만천하에 삶이 전시된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것 같다. 올해 초 카드사에서 고객정보가 유출됐을 때 나는 주민번호, 전화번호, 집 주소 등 무려 10가지나 되는 개인정보를 털렸다. 집 앞 마트에서 장볼 때나 쓰는 신용카드의 마일리지를 모으려던 게 화근이었다. 적립금은 고작 280원이었다. 그 뒤론 거의 매일 스미싱·피싱 폭풍에 시달린다. 카드사의 사과문을 박박 찢어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며칠 전엔 한 소셜코머스 업체에서 3년 전 고객정보가 유출돼 113만명의 정보가 빠져나갔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케이티도 고객 1200만명의 정보가 유출됐다고 한다. 거의 전국민의 ‘신상’이 털렸는데 나라고 별수 있었겠느냐고 이젠 자포자기하는 심정이다.

정부의 정보 집적은 더 광범위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모든 국민의 출생에서 사망까지 1조3000억건에 이르는 건강정보 빅데이터를 갖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복지 대상자를 추려내려고 만든 사회복지통합관리망(행복e음)은 국민의 개인정보가 가장 많이 포함된 시스템이다. 그것도 소득·재산·가족관계·출입국 정보 같은 매우 민감한 정보가 수백종 연계돼 있다.

문제는 이런 방대한 시스템에 보안 문제가 발생할 때다. 그땐 기업의 고객정보 유출 정도로 피해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정보유출 가능성이 없다고 강변해왔지만, 한 기관에서 나온 연구보고서를 살펴보니 사회복지통합관리망의 정보보안 수준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거듭 나온다. 아찔하다. 복지 서비스를 받을 때 누군가 내 신상정보를 일일이 들춰보고 감시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오싹한데 말이다.

일상은 수시로 수집된다. 어느 택시 안 블랙박스엔 취재원과 나눈 은밀한 통화 내용이 녹음돼 있을 것이다. 길거리 곳곳에 시시티브이(CCTV)가 설치돼 있으며, 누가 어떤 내 모습을 찍고 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오래 만나지 못한 사람이 “너 어제 미역국 끓여 먹었더라” 하는 얘길 들으면 소름이 돋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스스로 내 일상을 전시하며 ‘사찰’하도록 도운 셈이다.

재독 학자 한병철은 디지털 매체가 원형감옥인 파놉티콘을 만든다고 했다. 정보가 투명해지면 좋을 것 같지만 그런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닌 통제사회라고 일갈한다. 권력자의 비리처럼 정작 알려져야 할 커다란 진실은 감춰지고, 일반인들의 일상은 낱낱이 폭로되기 일쑤다. 자발적 통제는 특히 사회가 위협에 처했을 때 날을 세운다. 2009년 신종플루 유행기엔 기침하는 이웃집 아이가 마스크를 쓰지 않고 마트에 돌아다닌다는 ‘동네 첩보’가 인터넷에 속출했다. 주부들은 가족들을 지키려고 지역 내 감시자가 돼 스스로 안전 지도를 그려나갔다. 국가조차 믿을 수 없는 공포의 시기였기에 자발적으로 이웃의 신체를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신종플루에 걸린 뒤 왕따를 견디지 못하고 전학을 간 아이도 있었고, 가족이 통째로 이사를 가기도 했다. 일상의 감시와 통제는 뜻밖의 피해자를 낳을 수도 있다.

비밀 없는 사회엔 진정한 휴식도, 남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여지도 없다. 다르면 ‘찍히기’ 때문이다. 이런 감옥 안에서 탈옥의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게 좌절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다. 우리 모두 홀몸노인 예비군이므로 늙어서는 특히 일상을 지켜봐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단연코 사양한다. 나이 들어 돌아갈 때가 되었다 싶으면 남몰래 천천히 산속으로 들어가 마지막 남은 힘으로 낙엽을 덮고 사라질 자유, 그렇게 하더라도 내 마지막이 전시되지 않을 자유가 필요하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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