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1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해 국정원 개혁안 통과를 지켜본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5·16 혁명은 쿠데타이다”라고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답할 때부터 국가정보원의 앞날이 걱정됐다. 박정희와 김종필 등 일부 정치군인들이 민주정부를 뒤엎고 권력을 찬탈한 5·16을 ‘쿠데타’라고 정의하면서도 ‘혁명’으로 격상시킨 그의 이중적 사고방식을 보고는 정보기관의 정상화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이 처한 시대적 과제는 분명했다. 대선 개입 등 이명박 정권에서 저지른 음습한 공작정치의 책임자를 가려내고, 조직을 해외 및 대북정보 수집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박 정권의 초대 국정원장이 된 남재준이 ‘5·16=쿠데타’라고 한 바른 인식과 군 시절 별명이었던 ‘선비’의 정신으로 매진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5·16=혁명’의 사고를 따르는 행보를 했다. 심리전단의 인터넷 댓글 공작을 “개인적 일탈 행위”로 치부하고는 검찰 수사를 받는 관련자들에게 진술 거부를 지시했다. 기소된 직원들의 변호사비는 예산으로 냈다. 이뿐 아니다. 그는 국가기밀을 보호해야 함에도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국정원 직원의 명예”를 내세워 무단 공개했다. 오죽하면 외국 언론이 ‘기밀 누설자’ ‘정치적 선동꾼’이라고 국정원장을 조롱했겠는가. 그는 또 대화록에 엔엘엘(NLL·북방한계선) 포기나 양보라는 말이 전혀 없는데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엔엘엘을 포기하는 발언을 했다”고 해석했다. 여당 의원조차 국정원장이 이적행위를 한다고 비판했다.
당시 박 대통령이 국정원장 남재준을 경질하는 등 단호하게 문책했다면 어땠을까. 눈치 빠른 국정원 직원들은 이명박 정부 때와는 다른 방식의 길을 스스로 찾으면서 준법의식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소중한 집권 첫해를 이전 정권의 대선 개입 문제로 허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문책은커녕 도리어 남 원장에게 상을 내렸다. 국정원 ‘셀프 개혁’을 주문하면서 칼자루를 그에게 쥐여줬다. 과도한 신념의 ‘전사’에게 힘이 실리자, 국가안보의 최전선에 있어야 할 직원들은 국내 정보 전선에서 계속 기웃거렸다. 마침내 상부의 입맛에 맞춰 재판 증거를 조작하는 불법을 저지르는 데까지 이르렀다.
국정원이 국민의 피땀으로 이룩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집단으로 전락하는 동안 정보기관이 갖춰야 할 정보 능력은 바닥에 떨어졌다. 지난달 14일 중국 정부가 “국정원과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유우성씨의 중국 출입경기록 3건은 모두 위조된 것”이라고 밝힌 뒤에도 국정원은 협력자 김아무개씨가 유서에서 “위조됐다”고 고백하기까지 무려 20일 가까이 문서가 진짜라고 공언했다. 정말로 진짜로 믿었다면 무능이 하늘을 찌른다. 알고도 그랬다면 최고의 대국민 사기 공작이다.
남재준 국정원이 이 지경인데도 박 대통령은 “(검찰 수사에서)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잡을 것”이라며 또다시 문책 여부를 수사 뒤로 미뤘다. 수사에 비협조적인 국정원 태도로 볼 때 남 원장에게까지 증거조작의 불똥이 튈 가능성은 없다. 댓글 사건 때 “철저한 조사와 사법부 판단이 나오는 대로 불편부당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국정원에 면죄부를 줬던 것과 똑같다.
조직 우두머리에게 지휘 책임을 묻는 것은 개인에 대한 문책이기보다 그 조직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따라서 국정원장을 그대로 두는 것은 국정원 직원들에게 지금 방식대로 일을 계속하라는 메시지다. 조직의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잘못이 드러나더라도 “개인적 일탈” “사소한 잘못”으로 취급될 것이며, 변호사비 등의 뒷감당은 걱정 말라는 신호로 읽힌다. 국가안보의 척후병들은 또다시 불법과 탈법의 관행이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김종철 정치부 기자 phill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