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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미생’ 읽고 취하기 / 임범

등록 2014-03-17 18:39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사미루’(四美樓)라는 카페가 있다. 입구에 ‘사미’, ‘네 가지 아름다움’에 대한 해석이 붙어 있다.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치, 구경하고 즐기는 마음, 유쾌한 일’이란다. 아름다움 중에 ‘좋은 시절’이 첫째? 그렇지! 전쟁이 일어나거나, 역병이 돌거나, 폭정이 횡행하는 시절엔 아름다움을 말하기 힘들지. 지금은 ‘좋은 시절’인가?

그 카페에서 윤태호의 <미생>을 읽었다. 만화 안 팔리는 요즘에 60만부가 나간 베스트셀러이다. 만화가 장면으로 기억될 때가 있다. 허영만의 <타짜>에서 화투 노름으로 재산을 다 날린 주인공 머리 위 밤하늘에 보름달 아닌 화투짝 8광이 떠 있다. 광기, 희망, 낭만과 유머까지 다 담아낸 한 컷. 그런 매력이 <미생>엔 장면 아닌 한 챕터로 연출돼 있었다.

대기업 종합상사에 2년 계약직으로 힘겹게 들어간 주인공. 고군분투 끝에 자기 제안으로 시작된 안건이, 사장 이하 임원 전체가 참가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통과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다. 계약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0%. 성취감도 잠시다. 다른 일이 밀려온다. 그사이 짧은 순간을 붙잡아 주인공의 주변과 지난 일을 몽타주로 이어붙이면서 보들레르의 시 ‘취해라’를 낭송하듯 인용한다.

‘취해라/ ~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 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 버리거든/ 물어보아라/ ~ 지금이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 대답할 것이다/ 이제 취할 시간이다.’

흔히들 이 시에서 ‘취한다’는 걸 권태, 무의미에 맞서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틀린 건 아닐 텐데 맛이 떨어진다. 이 만화에선 맛이 십분 살아났다. <미생>이 광범한 독자를 사로잡은 이유가 뭘까. 이 만화는 기업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개인의 성취와 사랑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그러면 회사와 회사원이 하는 일에 윤리의 우열을 따져 묻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는다. 묘했다. 윤리 문제를 접으니 더 돋보였다. 이 사회의 일이 어떤 건지. 취하기가 왜, 얼마나 힘든지.

만화 속 회사원들이 말한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 “이런 게 회사였지. 일 하나 하면서 무슨 일씩이나 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 “판이 어떻게 우리 눈에 보이겠냐? 판 위에서 비틀거리는 놈이 어떻게 판을 봐? 너 지구가 둥글게 보여? 우린 판 못 봐. 그러니까 제때 자기 삶 챙기면서 살자고.” 그들에게 세상은, 회사는 선택한 게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만화 중간중간에 바둑 기보가 곁들여지는데, 흰돌과 검은돌이 어쩔 수 없이 직선을 그리며 나란히 달리는 수를 두고 해설자가 말한다. “흐르는 물이 앞을 다투지 않듯 혹은 그렇게 나아가면 된다. 적자생존의 승부 세계에서 이건 얼마나 귀한 사치인가.” 이 사치와 ‘취한다’가 동의어로 들린다. ‘취한다’의 반대말은 권태가 아니라, 각박함이고 전쟁인 거다. 취하는 건 전쟁터의 총성과 피비린내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온전한 감각을 회복할 때, 그렇게 자기 고양감을 얻는 때일 거다. 그러기가 얼마나 힘든가. 취하지 못하는 우리와, 취하는 순간에 대한 사치스런 희구. <미생>의 매력이 그렇게 느껴졌다.

다시, 지금은 좋은 시절인가? <미생> 식으로 말하면, 좋은 시절, 나쁜 시절은 없다. 그냥 주어진 시절이 있을 뿐이다. 카페 창밖에서 봄이 안을 들여다보며 말하는 것 같다. 취할 시간이라고.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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