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영 집필노동자
중학교에 입학해서 성교육을 받았다. 성교육용으로 제작된 비디오를 틀어줬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남녀 청소년들이 캠핑을 갔다, 모닥불 피우고 밥해 먹으면서 잘 놀았다, 늦은 밤 각자 텐트에 들어가 잠을 잔다, 갑자기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이 자는 텐트를 침범한다, 텐트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 성폭행을 암시한다, 여학생들의 비명 소리…… 결론은 남학생들과 놀러 가면 ‘큰일’ 나니까 같이 다니지 말라는 얘기다. 한심한 교육이었다. 늘 여성을 단속한다. 간혹 치한과 맞닥뜨렸을 때 써먹을 수 있는 호신술을 알려주기도 한다. 어설프게 호신술 쓰다가 더 두드려 맞을까 봐 무섭다.
여성이 조심하도록 강조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남성의 폭력을 불가피한 본능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진짜 폭력은 바로 이 관념에 있다. 한쪽은 폭력을 피하도록 길러지고 다른 한쪽은 폭력이 폭력인 줄 모르게 길러진다. 어릴 때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 치마를 덜렁 들추고 낄낄거리는 행동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건 일종의 ‘놀이’다. 놀이지만 여자아이는 운다. 추행과 놀이의 개념은 이렇게 혼선을 빚는다. 가해자는 자신이 도대체 어떤 ‘가해’를 했는지 인식하기 어렵다. 사소한, 농담, 장난, 친근감 표시일 뿐이다. 피해자가 폭력 피해 사실을 ‘인정’받으려면 누구나 명명백백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로 죽기 직전까지 되거나 죽어야만 한다.
한국의 성폭력은 ‘신고된’ 피해만 해마다 2만건에 달한다. 폭력을 피해가면 오히려 운이 좋다고 볼 수 있다. 다른 나라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유럽연합 기본권기구가 유럽의 28개국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15살 이상의 여성 세 명 중 한 명은 일생 동안 최소 한 번의 성폭력을 경험한다고 한다. 구타가 없는 ‘자잘한’ 성추행까지 치자면 피해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의미 없을 정도로 성폭력은 일상적이다.
이번 정부가 4대악 중 하나로 성폭력을 내세웠지만 성폭력은 지금까지 국가가 참여 혹은 방관했던 범죄다. 여성은 늘 국가의 안녕을 위해 거래된 후 버림받았다. 고려시대에는 ‘공녀’로 원나라에 바쳐지는 ‘인간 조공’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는 정조를 잃은 여성으로 취급받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위안부’로 희생되어 피해자임에도 수치심을 느껴야 했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미군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도록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관리되었으나 ‘양공주’라는 멸시를 당해야 했다. 국가의 보상은 없다. 90년대 이후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분노가 공론화되었지만 그 이유가 ‘여성’을 향한 국가 폭력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남성의 ‘소유물’인 한국 여성을 일제에 빼앗겼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여성들에게 밤길 조심하라고 하지만 밤길에 낯선 사람에게 피해를 입기보다 일상의 공간에서 아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겪는 경우가 더 많다. 더구나 폐쇄적인 군대에서 여성이나 성소수자에게는 전시의 적군보다 평화시의 아군이 더 위험하다. 적군과의 교전은 일상이 아니지만 아군은 늘 보는 동료다. 폭력은 주변에서 ‘평화롭게’ 펼쳐지고 국가와 공권력, 사법부까지 총단결하여 폭력행위를 옹호한다. 여군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고 언어폭력으로 자살에 이르게 한 가해 군인은 육군의 보호 아래 제대로 벌을 받지 않으니 자신이 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여전히 모를 것이다. 그렇게 폭력은 이어진다.
성의 역사에 집중했던 미셸 푸코는 철학의 역할은 숨겨진 것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정확히 보이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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