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이 ‘바이오벤처 20년: 역사, 현황, 발전과제’라는 보고서를 펴냈다. 보고서는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도구적 관점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는 “한 국가의 바이오 벤처 생태계가 지닌 ‘힘’ 혹은 ‘성숙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국 자본시장에 있”고, “기술 개발은 어느 나라나 할 수 있고, 정부가 지속적으로 투자하면 어느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에서 정점을 이룬다. 보고서는 아이디어를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본다. 특히 아이디어 그 이면에 놓여 있는 본질적인 문화의 차이에는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혁신적 아이디어들은 주변부의 소그룹에서 탄생했다.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은 에든버러 사변협회와 같은 소그룹을 주축으로, 향후 영국 전체의 지적 흐름을 좌우할 학파들을 만들어냈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의 핵심적인 아이디어 대부분을 발표하게 될 ‘코펜하겐 그룹’을 시작했다. 미국이 문화적으로 유럽의 주변부에 불과하던 1872~3년의 9개월 동안,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네 명의 지식인은 향후 미국을 지배하게 될 사상, 프래그머티즘을 정초했다. 유럽의 주변부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에서, 과학과 철학의 잡종적 지식인들은 향후 철학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릴 야심찬 계획을 논의했다. 그들의 이름은 비엔나 학단, 그들의 철학은 논리실증주의라 불린다.
세계사의 흐름을 완벽하게 뒤바꾼 소그룹은 1960~70년대 매사추세츠대(MIT)와 실리콘밸리에서 등장했다. 스스로를 해커라 부르던 엠아이티의 소그룹은 아이비엠(IBM)이라는 폐쇄적 관료집단에 저항하며 ‘컴퓨터에 대한 접근은 무제한적이고 완전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윤리원칙을 내걸었고, 카피레프트, 오픈소스, 리눅스 등의 결과들을 이끌어냈다. 68운동의 진정한 유산은 반전시위나 히피문화가 아니라 해커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를 불신하고, 탈중심성과 저항정신으로 무장한 해커문화는 컴퓨터가 뒤바꿀 세상에서 자본의 탈주를 견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비슷한 운동이 ‘바이오해커’ 혹은 ‘디아이와이(DIY)생물학’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지고 있다. 10여년 전부터 생물학과 컴퓨터과학 모두에 유능한 젊은이들은 대학과 회사라는 권위를 거부하고 자기 집 지하실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미국의 주요 도시들에 디아이와이생물학 실험실이 퍼져나가고 있다.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거부, 스스로 만든 윤리원칙, 개방성, 탈중심성, 이들의 문화는 1970년대의 해커들과 너무나 유사하다. 애플 컴퓨터와 구글의 검색엔진 모두가 창고에서 개발되었듯이, 바이오벤처의 개벽도 이들 중 누군가의 지하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장소가 한국일 것 같지는 않다. 한국엔 디아이와이생물학 실험실이 없다.
정부의 주도로 혁신이 시작된 역사는 없다. 정부에 의해 주도되는 바이오벤처 육성 전략이 창조경제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고, 어느 나라보다 권위주의와 관료주의가 강한 정부 시스템을 지닌 한국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꿀 혁신은 탄생할 리 없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소그룹의 저항정신에 불을 지피는 거대한 적으로서의 역할뿐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바이오벤처의 혁신을 위해 뭔가 하고 싶다면, 마당을 개방하고,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고, 그 마당에 깡패들이 침입할 수 없도록 막아주는 일이다. 잔칫상에 무슨 과일을 놓아야 하는지까지 간섭하는 한국 정부의 창조경제 체제에서 혁신은 허풍이다.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는 뭔가 있다. 프래그머티즘, 해커문화, 디아이와이생물학 모두가 그곳에서 등장했다. 돈 안 드는 창조경제를 원한다면 바로 그곳의 역사와 문화에 주목할 일이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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