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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제이슨 본과 국정원 / 임범

등록 2014-04-14 18:43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갑자기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 3부작 영화 ‘본 시리즈’가 생각났다. 검찰의 국정원 증거조작 사건 수사 결과 발표를 보고 나서였다. 룰, 규칙이 뭘까? 이야기의 룰은 실제 세상의 룰과 다른 건가?

‘본 시리즈’는 전직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제이슨 본이 현직 시아이에이 요원들과 싸우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요원들끼리 싸운다. 일련의 시아이에이 간부들이 과거의 불법공작을 은폐하기 위해, 그 공작과 아무 관련도 없는 현직 요원들에게 본을 사살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본도 이 요원들이 단지 명령을 수행할 뿐이라는 점을 알지만 자기가 살기 위해 그들을 죽인다. 요원들이 마주치는 곳은 전쟁터가 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이들이 싸우고 죽어나가는 이유는 단 하나, 불법공작을 감추기 위해서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옛날 안기부의 부훈을 빌려 말하면 음지에서 한 일이 양지에서 들통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액션영화에서 폭력 장면의 의도 중 하나가 나쁜 놈을 패 주거나 죽일 때 오는 쾌감일 거다. 이 시리즈에선 요원들끼리 싸우다 한명이 죽을 때, 이상하게 그런 쾌감이 생기지 않았다. 대신 처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람 목숨이 아깝게 보이도록 하는 액션활극? 이걸 가능하게 하는 게 뭘까. 영화의 감독, 특히 2, 3편을 연출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화면 연출 탓도 있겠지만 그 때문만은 아닐 거다.

바로 이야기의 룰 아닐까. 그건 불법공작이 들통나면, 양지에서 들키면, 법치의 그물에 걸리면, 죽는다는 거다. 그들이 무법천지를 누비는 건 어디까지나 안 들킨다는 전제 아래서, 음지에서, 법치의 그물 밖에서의 얘기다. 법치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너희들 다 끝이라는 믿음, 그게 이 이야기의 전제가 되는 룰이다. 그걸 이야기를 만드는 이나 소비하는 이 모두가 안다. 처연함, 비정함 모두 그래서 생겨난다. 음모와 암살이 가득한 요원들의 세계를 다루는, 이런 이야기의 룰이야말로 법치인 거다.

실제 세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보기관, 첩보기관은 다른 곳에선 하지 못하는 편법, 불법 행위를 할 거라고 대다수 사람들은 생각할 거다. 그런 게 정보기관이라는 데 암묵적 동의가 있을 거다. 하지만 불법행위가 들통났을 때 묵인해주자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 그게 묵인되면 법치국가가 아닌 거다. 정보기관의 필요성에 동의하든 안 하든 그런 논의가 이뤄지려면 그들이 들통나지 않게 일한다는 것, 나아가 불법행위가 들통났을 땐 가차없이 처벌을 받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말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을 거다. ‘양지에서 들키면 죽는다’는.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라는 국정원의 새 모토 중에 ‘무명의 헌신’이라는 말에 담긴 비장한 느낌도 같은 맥락으로 읽히지 않나.

실제 세상에서는 어떤가. 중앙정보부 시절? 여당 의원조차 중앙정보부는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 게 아니라 ‘음지에서 민주주의를 조졌다’고 말했으니 차치하자. 안기부 시절부터 불법행위가 양지에서 들키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게 사라지기는커녕 최근 들어 빈발하더니 국정원 증거조작 사건까지 왔다. 그동안 국정원의 불법행위에 대해 엄중한 처벌까지는 접어두고 합당한 처벌이 이뤄졌다고,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진 적이 있었나. 이번에는 다르려니 했는데, 법치라는 룰이 이야기 속에서만큼도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제이슨 본’ 시리즈에서, 중앙정보국의 과거 불법공작이 만천하에 알려졌는데 거기에 관여한 중앙정보국 간부들이 처벌받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엔딩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야기도 깨지 못하는 룰이 있는 건데….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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