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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죄인들 / 이라영

등록 2014-04-23 19:07수정 2014-04-24 09:35

이라영 집필노동자
이라영 집필노동자
일상의 회복이 언제쯤 가능할지 짐작하기 어렵다. 황무지에서도 꽃이 피는 4월에 우리는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가족 중에 임신한 사람이 생겨서 침몰 사고 다음날 축하를 전하고 기쁨을 나누다가도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에 서로 우물거렸다. 임신부를 걱정해서 당분간 뉴스를 멀리하라는 말을 해놓고 보니 심경이 복잡해졌다. 즐거운 말 한마디도 눈치가 보인다. 전 국민이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는 이 상황을 생각하면 ‘국민행복’을 떠벌린 사람이야말로 최악의 유언비어를 유포한 셈이다.

정체불명의 전염병으로 한 도시의 시민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지만 정부는 도시를 봉쇄하여 시민을 ‘버렸다’. 정유정의 소설 <28>의 이야기다. 이 책을 읽을 당시 이틀 동안 온몸의 근육이 아팠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너무 긴장을 한 탓이다. 읽고 난 후에는 일주일이 넘게 소설 속 등장 인(견犬)물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가상의 생명이라도 더 마음 가는 사람과 동물이 있기 마련이다. 이 소설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공교롭게도 내게 가장 감정이입이 덜 되던 사람들이었다. 작가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다 점차 그 이유를 알아갔다.

<28>을 에워싸고 있는 커다란 정서는 죄책감이다. 늑대들에게 썰매개를 먹이로 내주고 자신은 살아남았던 주인공의 가슴속에 뿌리내린 어떤 목소리가 있다. 썰매개들의 모견이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에게 물어왔다. “대장, 내 아이들을 어쨌어?”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물음이다. 그의 양심의 소리다. 소설의 마지막에 살아남은 다른 인물들도 바로 이와 같은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인솔하던 교감은 ‘죄책감’이라는 화두를 남기고 떠났다.(우연이겠지만 그는 윤리교사였다.) 300명 이상이 ‘사망자’와 ‘실종자’가 된 대형 참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가 스스로 다시 죽음을 택했다는 사실은 이 사고의 비극적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에 앞서 교사들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자신을 ‘죄인’이라 한다. 참사 이후 어떤 이에게는 ‘살아있음’,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죄의식을 갖게 한다. 우리가 맞닥뜨린 혼란과 공포다.

‘가족의 사투’ 외에는 아무런 보호 장치가 없는 불신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억울함은 종종 죄의식으로 변한다. 반면 권력을 가질수록 죄의식에서 멀어진다. 이 끔찍한 사고 후에 우리 사회 기득권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고스란히 까발려지고 있다. 다수의 안전이나 희생자를 위한 애도보다 고위층을 위한 의전이 더 중요하다. 억울하면 출세하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무책임한 제도를 바꾸지 못하도록, 이 사회를 지배하는 방식이다.

‘나’의 세계를 벗어나 타인의 존재를 인식할수록 죄책감의 무게에 짓눌린다. 하지만 ‘나’에 갇힌 인간들은 역지사지 능력이 없기에 수치심도 죄책감도 없다. 관료들은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고 대통령을 모시기에 바쁘다. 정상 운항 중에는 거친 바다에서 배가 탑승객을 보호하지만 침몰이 시작되면 그 배를 떠나야 살 수 있듯이, 정상적이지 않은 국가와 정부는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위협한다.

비정규직이지만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 있고, 왕처럼 대우받으면서 끝까지 아무 책임도 안 지는 사람이 있다. 그저 무능한 ‘아랫것들’을 꾸짖으며 대통령은 사뿐히 책임에서 ‘탈출’한다. 선장과 해운사는 가장 찾기 쉬운 책임자일 뿐이다. 죄의식도 없고 애도조차 할 줄 모르는 이 ‘미개한’ 권력의 “진원지를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 인간이 툭하면 비하하는 동물도 애도를 할 줄 안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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