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대기자
1992년 보스니아 내전 때 무슬림을 학살한 세르비아계 정교도들은 대개 이웃 마을 사람들이었다.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사람이었고, 추수 때면 팔을 걷고 도와줬던 이웃”이었다. 그들의 종교·민족적 광기에 불을 붙인 건 정치꾼들이 퍼뜨린 유언비어였다. ‘무슬림들이 정교도들을 방화하고 살해하려 한다!’ 불안과 공포에서 출발한 것이 종국엔, ‘총구를 머리에 들이대고 아들과 아버지에게 엄마와 딸에게 패륜을 강요’하다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게 학살된 무슬림과 가톨릭계는 25만여명.
광기에 불을 붙인 이런 유언비어는 나치의 유대인, 집시 학살을 정당화하고, 터키 정부의 아르메니아인 인종청소를 합리화했으며, 캄보디아를 킬링필드로 만들었고, 르완다의 종족 갈등과 인종청소를 야기했다. 권력욕에 눈먼 정치집단은 그렇게 공포와 적개심을 자극해 학살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정치권력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려 했다. 한국인? 그들은 피해자이기도 했고, 가해자이기도 했다.
1923년 9월 간토(관동)대지진이 도쿄 일원을 덮치자, 일본인들은 ‘조센진’들을 보이는 대로 학살했다. 이들을 자극한 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 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려고 한다는 유언비어. 당시 일본인 자경단에 의해 검, 죽창 등으로 희생당한 조선인은 무려 6천여명. 유언비어는 일본 정치집단에서 비롯됐다. 내무성은 각 지역 경찰서에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했고, 언론이 이를 유포했다. 당시 일본 정치집단은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 불안과 혼란을 수습하는 데 희생양이 필요했다.
6·25 전쟁기 한국인의 광기도 이에 못지않았다. 인민군이 남침하자, 남쪽의 군과 경찰은 전국적으로 빨갱이 청소에 나서 10만~20만명의 보도연맹 회원들을 학살했다. 인민군 점령기,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군경 및 우익단체 회원과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다시 국군이 진주하면서, 부역자로 지목된 이들이 처형당했다. 군경이 주도했다지만, 이웃끼리 피의 학살을 번갈아 자행했다.
2일 박근혜 대통령은 유언비어가 세월호 유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사회 혼란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참사 이후 많은 선동적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그러나 치명적인 것은 정권 집단에서 나왔다. 새누리당 최고위원인 한기호씨는 4월20일 “북괴의 지령에 놀아나는 좌파 단체와 좌파 사이버 테러리스트들이 정부 전복 작전을 전개할 것이다. 국가 안보 조직은 근원부터 발본 색출해서 제거하고, 민간 안보 그룹은 단호히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토대지진 때 내무성 지침을 연상케 하는 말이었다. 그날 새누리당 국회의원인 권은희씨는 실제 유족인 한 여인을 “유가족인 척하는 선동꾼 여자의 동영상”이라며 글과 동영상을 올렸다. 이를 전후해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 첩보를 부단히 공개하며 불쏘시개를 제공했다. 지만원씨는 22일 “박 대통령을 쫓아내기 위한 빨갱이들의 ‘제2의 5·18 반란’에 대비해야 한다. … 시체장사 한두번 당해봤나. 세월호 참사는 이를 위한 불쏘시개”라고 떠벌렸다.
너무 저질이었던지, 한동안 관변 유언비어는 뜸했다. 그 물꼬를 튼 것은 기이하게도 박 대통령의 2일 발언이었다. 이튿날 새누리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였던 정미홍씨는 “자원봉사자라며 정부의 구조 노력을 폄하하고, 유가족들의 분노를 더욱 키우는 유언비어를 대량으로 확산시키고…” “판단력 없는 청소년들을 이용해 반정부, 반대한민국적 사고부터 가르치는 세력도 나타났다” “이들은 결국 수많은 종북 성향 지자체장들을 당선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튿날 그는 ‘박근혜 퇴진 시위에 청소년들 일당 6만원에 동원’이라는 막장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끔찍한 선동이었다. 분쟁 시기, 반인륜적 인종청소를 불러온 유언비어들과 다르지 않았다. 나치의 괴벨스 문법을 고스란히 따른 것이었다. “거짓말은 처음엔 부정되고, 다음엔 의심받지만, 거듭하면 결국 믿게 된다.” 그러나 ‘권력욕에 눈 먼’ 자들의 무책임한 유언비어가 거대한 반인륜 학살의 업으로 돌아온다. 권력이 그렇게 좋은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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