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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당신들은 아니야 / 이유진

등록 2014-05-18 18:21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유진 문화부 기자
세월호 참사 한달이 지나자, “나라가 이럴 수 있냐”는 장탄식에 답하는 학자들의 분석이 줄을 잇는다. ‘비리사고사회’, ‘재난사회’, ‘기업국가’ 등의 개념이 나왔고, 이제 이런 나라에서 벗어나자고 한다. 그중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의 분석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한국을 가리켜 “허약한 국가”라고 했다. ‘강력한 국가’란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고 피해자 앞에 무릎 꿇지만, 이곳은 개인의 생명을 외면하고 피해자를 국가 앞에 무릎 꿇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대보다 우려가 적지 않다. 권영숙 서울대 교수는 “두고 보라. 사회 특성에 대한 캠페인 운동이 곧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회를 바꾸자는 저항담론을 역이용해 국가와 기업이 손잡고 ‘강한 나라 운동’을 전개할 게 뻔하다는 얘기다. 이재승 건국대 교수는 일본의 ‘1억 총참회’를 언급했다. “전후 일본이 그렇게 집단 책임과 죄의식을 털어내면서 ‘새 국가 건설’을 추진했듯, 누군가 참회 뒤 ‘새 국가를 건설하자’는 얘기를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국가개조론’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서 이런 제안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한때 힘깨나 쓰던 보수 인사들이 총출동한 범국민운동단체도 ‘새로운 한국’을 만들자고 외친다. 친박계 의원들이 중심이 돼 ‘세월호참회특별법’을 발의했다고 한다. 기시감에 소름이 돋는다.

1997년 ‘박정희 부활론’이 한창일 때 4·19 선언문을 기초한 이수정(작고) 전 문화부 장관을 인터뷰했다. 그는 4·19가 민주주의 혁명이었지만 그 안에는 ‘선진국’을 꿈꾸며 발전된 자본주의를 향한 욕망이 내장돼 있었노라고 말했다. “민주적 방법이라면 좋았겠지만” 5·16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경제를 발전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에둘러 평가했다.

요즘 그 말이 자꾸 생각나 조마조마하다. 국가나 사회가 제 몫을 하도록 만들자는 저항적 요구를 ‘강한 지도자’, ‘강한 국가’ 운동으로 냉큼 바꿔 시국을 뒤덮어버릴까 봐서다. “새로 시작하자”며 채찍질당할 생각을 하니 벌써 지친다. 그동안 들었던 수많은 ‘촛불’의 실패도 떠오른다.

꿈으로 내면을 탐색하는 꿈작업가 고혜경 박사는 “4월16일 전후 사람들의 꿈이 너무 다르다”고 했다. 사고 직후엔 많은 사람들이 악몽을 꿨는데, 너무 무서워 내용을 기억하지도 못했단다. 최근 들어서는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꿈을 많이 꾼다고 한다. “노래·악기 꿈은 가장 혼란한 시기에 ‘새판’을 짜는 꿈”이라고 했다.

새판을 짜자니 ‘국가개조론’에 포섭될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살 수도 없는 딜레마의 시기다. 그래도 분명한 건,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주체’를 담당해온 사람들이 또다시 중심에 서겠다고 나서는 일을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제발전’이나 ‘민족중흥’이라는 말로 생명, 노동, 평등 같은 가치를 송두리째 외면해온 당사자들만큼은 이 판에서 빼야 한다. 온 나라가 노란 리본의 물결을 이룰 때 왜곡된 기초연금법을 통과시키는 데 한몫한 야당 지도부들도 아니다. 그들이 만든 사회가 세월호를 침몰로 이끌고 구조에도 실패한 것 아닌가.

그들을 빼고, 아직까지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국가의 방치 아래 그냥 죽도록 내버려졌던 다양한 하위주체들이 새판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그런 주체들의 연대를 구상해야 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에겐 이제 책임이 생겼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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