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칼럼니스트
<캐치-22>(Catch-22)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존 요사리안은 2차 대전 당시 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 대위다. 그는 노련한 폭격수지만 위험한 비행출격을 그만두고 지상 보직으로 전출되길 원한다. 일정한 출격 횟수를 채우면 임무 교대가 가능한데 상관은 그 횟수를 자꾸 연장시킨다. 참다못한 그는 자신이 미쳤기 때문에 전투에 부적합하다며 출격임무 해제를 집요하게 요구한다. 하지만 계속 거부당한다. 캐치-22 규칙 때문이다. ‘스스로 미쳤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미친 게 아니므로 전투에 나가야 한다.’ 그럼 진짜 미친 사람은? 미친 사람은 자신이 미쳤다고 자백하지 않았으므로 계속 전투에 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미쳤든 안 미쳤든 전투에 나갈 수밖에 없다. 극이 진행되며 독자들은 알아차린다. 주인공만 빼고 주변인들이 전부 미쳤다는 사실을. ‘캐치-22’가 존재하지 않는 규칙이란 사실을 알게 된 요사리안은 소형 보트를 타고 탈영을 감행한다.
캐치-22는 일종의 순환논리지만 정확히는 이중구속(double-bind) 상황에 가깝다. 이중구속이란 인류학자 베이트슨(G. Bateson)이 창안한 개념으로, 모순되는 두 개의 메시지를 동시에 수신해야 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자식에게 극히 냉정한 태도를 보이면서 입으로는 “사랑한다”를 반복하는 부모를 떠올려보자. 어린아이는 부모의 진의가 무엇인지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하게 된다. 베이트슨은 조현병(정신분열증)이 이중구속 상황과 관련있다고 생각했다. 이론의 맥락에서 이중구속은 인간의 내면을 무너뜨릴 정도로 파괴적인 기제다.
캐치-22 규정은 ‘미친 사람은 전투에서 제외된다’는 상식적인 선택지를 전제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상식은 관철되지 않는다. 관철되지 않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이중구속 상황도 대개 그렇다. “기탄없이 비판해주기 바란다”고 해놓고 정작 기탄없이 비판하면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조직, “먹고 싶은 요리 다 시켜! 난 짜장면”이라 말하는 직장 상사 등이 흔히 볼 수 있는 이중구속의 주체다. 그뿐만 아니다. “기레기”를 욕하고 <뉴욕 타임스>를 숭앙하면서도 국내 언론에서 나온 의미 있는 탐사보도와 기획기사는 철저히 외면하는 ‘대중’ 역시 다르지 않다. “막장 드라마”라 욕하면서 그 막장극 꼬박꼬박 다 챙겨보는 시청자들도 마찬가지.
이런 이중구속은 ‘논리적인 모순이기에 답할 수 없는 질문’이 아니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암묵의 명령이다. ‘답정너’의 이중구속 상황은 인간 정신을 파괴한다기보다 알아서 기도록 길들인다. 단지 애인의 비위를 맞춰주는 차원이면 괜찮다(“나 살쪘나봐 어떡해” “아니거든, 너 완전 날씬하거든!”). 하지만 이중구속 상황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면 웃어넘길 문제가 아니다.
‘답정너’가 일반화된 세계는 도덕이 물신이 된 세계다. 정치는 정치인 개인의 도덕성을 검증하는 이벤트로 협소해진 반면 공동선을 위해 시스템의 치부를 고발한 윤리적 주체, 이를테면 내부 고발자는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지난 50년 동안 황망한 재난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때마다 사회는 ‘안전 불감증’을 반성하며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떠들어댔다. 사실 우리의 ‘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돈이 의리인기라. 억울하면 출세하든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곧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해서 자문한다. 우리는 정말로 이 사회를, 돈의 욕망과 공포에 굴복한 스스로의 규칙마저 바꿀 용기가 있는가.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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