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아람 작가
“부자들을 위한 축제, 가난한 자들에게 남는 쓰레기” 브라질의 월드컵 개최 반대 시위에서 사용된 구호다. 월드컵 비용으로 복지교육 예산을 확충해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대를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백명이 체포당했다. 브라질은 상위 1%의 소득이 하위 50%의 소득과 맞먹을 정도로 빈부 격차가 극심한 나라다. 그런데 시작부터 끝까지 익숙한 풍경이다. 88 올림픽 단독 개최를 반대하는 통일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노태우 정권은 시위대를 거리에서 수거하듯 잡아들였다. 역사는 재귀적으로 반복된다. 군사정권 치하 가택연금의 피해자였던 김대중 역시 대통령 집권 후 강력한 구조조정 정책을 밀어붙인 결과로 전국적인 규모의 파업 시위에 직면했고, 2002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시위 가담자를 대거 구속하는 것으로써 지난 정권들이 한 수 가르친 축제 공안을 재현했다.
축제의 절대적인 흥취 속에서, 불만을 거리에서 몰아내라는 집권자의 명령은 범국가적인 무관심으로 집행된다. 축제가 누군가를 배제하는 방식은 동의되기는커녕 인지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히 존재론적인 것이다. 올림픽 4위 달성, 월드컵 4강 달성과 같은 축제의 정점에서 사회의 시야는 그림자와 격리된다. 광장의 붉은 물결이 평소의 붉음과 사뭇 달랐던 2002 월드컵 포르투갈과의 축구경기, 박지성은 결승골을 넣고 영웅이 됐다. 그 전날 여중생 두 명은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 이 사건은 월드컵의 열기가 가을 삭풍에 식고 나서야 시민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2010년으로 건너뛰어 보자. 용산참사의 불지옥은 사회적 트라우마로 각인됐지만 뒤이은 법정의 논리지옥에 대한 기억에는 드문드문한 단절이 있다. 그때 우리는 천국을 겪는 중이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축구대표팀은 첫 원정 16강 진출을 달성했다. 이것이 바로 축제의 역사다.
다시 한 번 성대한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이 다가온다. 공이 잔디를 구르는 동안 지구의 자전조차 잠시 잊혀질 것이다. 이 기간 작가들은 책 내길 꺼리고, 사회파 영화들은 개봉을 미루고 숨을 고른다. 기자들은 중요한 글감을 비상금처럼 아껴두고 싶을 것이다. 바다에서 인양될 세월호는 대신 기억 깊숙이 가라앉고,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 활동과 간첩조작 사건 역시 역사가들의 몫으로 밀려날지 모른다. 축제는 모든 것을 삼킨다. 일상을 정지시키는 게 아니라 세계의 진행을 정지시킨다. 그래서 모두를 위한 축제라지만 기다림의 간절함은 아무래도 정치적 입장마다 다르다. 축제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을 때,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감정을 기억할 수 있을까? 사전에서 누락된 어휘처럼 다 지워져 버리는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서로에게 다짐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나를 잊지 말아줘, 결코 나를 잊어서는 안 돼.”
과대망상이 아니냐고?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나아간 이런 상상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우리가 축제 때문에 현실을 망각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망각하려고 축제를 벌이는 것이라면? 축제는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축제는 불바다인 전쟁과 피가 튀는 학살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죄책감의 산물이었다. 대한민국의 5개 국가경축일 가운데 4개가 전쟁과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의 45개 국가기념일 가운데 40%가량이 전쟁과 관련이 있다. 축제는 죄로부터 유래했다. 축제의 흥취에 익사 직전까지 젖었을 때 비로소 지나간 죄가 망각되는 것이라면, 반드시 축제는 계속되어야 한다. 인간의 죄가 계속되는 한.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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