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영 집필노동자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막국수를 먹다가 발견한 섬뜩한 말씀이 있다. 그 집 가훈인지, 식당 벽에 “남과 같이 해서는 남보다 나아질 수 없다”라는 문장이 곱게 붓글씨로 쓰여 액자 속에 걸려 있었다. 한 20년 전에 막국수 집에서 읽은 이 글귀가 어찌나 강렬했던지 20대 내내 두고두고 곱씹었다. 남보다 나아지기 위해서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남보다 나아져야 할 이유는 뭔가. 또한 ‘남’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떤 사람을 그 ‘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막국수 식당의 가훈만큼 내게 무서운 일화는 ‘고승덕 비빔밥’이다. “그가 교육감이 되면 학교급식으로 잘게 썬 비빔밥이 나오면 어떡하지?” 친구의 농담에 폭소가 터졌다. (안타깝게도 최근에 수술을 받아서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고시 3관왕’ 고승덕의 비빔밥은 유명하다. 처음으로 그의 비빔밥 일화를 알게 된 계기는 10년 전 가까운 사람이 보내 준 메일 한 통을 통해서였다. 당시 직장에서 우왕좌왕할 때 고승덕의 하루 17시간 공부와 비빔밥 일화를 적어 준 사람이 있다. 자극받고 열심히 살라는 뜻이었지만 일단 ‘먹기’를 무척 사랑하는 내게 이런 충고는 전혀 자극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메일 발신자를 무서워 보이게 만들었다.
감히 내가 이르지 못하는 대단한 노력을 비하할 생각은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1%의 성공담이 여전히 이 사회의 욕망에 영양가 없는 거름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청소년을 향한 그의 손짓은 대부분 성공법에 집중해 있다. ‘성공법’의 대표적 전도사가 서울시 교육감의 유력 후보다. 그는 과거에 티브이 강연에 나와 “꿈꾸고 노력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 고승덕의 책 제목이다. 얼마 전 새로 개정판도 나왔다.
꿈? 노력? 여기에 덧붙여 흔히 ‘의지’, ‘열정’도 부록으로 따라온다. 이런 단어를 ‘신뢰’했던 때가 있었다. 별로 가진 게 없을수록 노력이나 의지라는 말을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단어들이 인생을 고문한다. 중년의 나이에 이르고 보니 아마 내가 바로 그 막국수 집 가훈의 ‘남’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세상의 수많은 ‘남들’ 중 한 사람. 나만큼의 노력은 누구나 하고, 그 정도의 살고픈 의지도 누구나 있다. 그래서 나는 ‘남’이다.
고승덕이 강조하는 ‘남다른’ 노력의 결과 그는 남들보다 좋은 ‘스펙’을 거머쥐었다. 그의 노력은 경이롭다. 하지만 그의 꿈과 노력은 어디까지나 그의 인생을 위함이지, 그를 바라보는 대다수의 사람과는 상관이 없다. 밥을 씹는 시간조차 아까워 음식을 잘게 썰어서 한 번에 비벼 먹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노력하여 얻은 전문적 지식은 어디에서 빛을 내고 있는가. 미국에서 3개 대학의 학위를 획득했고 고시 3관왕이며 증권 전문가인 그는 비비케이(BBK) 주가조작 사건을 변호했다.
고승덕이 강조하는 ‘남다른’ 노력은 허상이다. 착하게 살면 천당 간다는 말처럼 미래를 빌미로 현재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의 맛있는 식사를 포기할 정도로 노력할 필요가 있는 그 미래는 어디에 있나.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삶이고 제 뱃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인간이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모르다가 와장창 수술을 하고 지금 한 달째 환자로 살고 있다. 요즘 남들의 도움으로 먹고, 입고, 씻으며 산다. 남다른 비빔밥이 아니라 남과 함께 맛있는 밥을 먹고 싶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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