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며칠 전 모 출판사 대표로부터 몽골 여행 중에 겪었던 이런저런 일에 관해 들었다. 원래 입담이 좋은 건지 일화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중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다. 짧은 에피소드였는데 이후로 그 에피소드는 내 머릿속에서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마치 내가 목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 속 정경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 안에 있던 무언가에 강하게 끌렸던 것이리라. 다른 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문장화할 때 그 이야기의 톤을 재현하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겪은 일처럼 써보기로 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시시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긴 하지만.
나는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는 편인데 몽골에 갈 때는 늘 같은 현지인 가이드의 신세를 진다. 얼굴이 둥글고 전체적으로 납작한 이 남자는 통역을 겸해 자질구레한 일들을 성실하게 처리해 준다. 이번에는 몽골의 어느 작은 촌락에 묵었다. 이곳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쯤 가면 야생동물이 심심찮게 출몰하는 평원이 있다고 한다. 가이드는 언제나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사슴 사냥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사냥에 필요한 총이며 도구들은 대여가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는 4륜구동차를 몰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사냥터에 도착했다. 주위는 드넓은 벌판으로 시선이 닿는 곳은 전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바다로 치면 남극 같은 느낌이다. 여름철에는 유목민이 거주하며 야생동물들과 한철을 보낸다고 한다. 지금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야생 매만 눈에 띈다.
가이드와 나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사슴 떼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참호를 파고 적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경계병처럼. 작은 보드카 한병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멀리서 기다랗게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사슴 떼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총구를 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위는 숨이 막힐 듯 조용해서 그들이 눈을 밟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마침내 사슴 떼가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방아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끼릭 하는 소리가 들렸을까. 맨 앞에서 걷던 사슴이 멈춰 서서 귀를 쫑긋거리더니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따르던 무리도 행군을 멈췄다. 소강상태는 몇초간 이어졌다. 그들과 우리 사이를 매서운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이윽고 선두에 선 사슴이 대열을 빠져나와 서너 발짝 비켜섰다. 그러고는 목을 꼿꼿이 편 채로 우리를 향해 가슴을 내밀며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두려움도, 체념도, 슬픔도, 혼란도, 그 어떤 공격성도 보이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맑은 눈이었다. 이내 사슴 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열을 빠져나온 사슴의 뒤편으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쳐다보던 사슴은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후의 일은 각자의 상상에 맡겨두기로 하자.
쓰고 나니 어설픈 우화 비슷하게 되어 버렸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최근 일련의 사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어떻게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결단하고, 결단의 책임도 내가 지겠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 권력의 중추 안에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안일하거나 도망치기 급급했다. 결국 사회는 좌초했고 거기에 탄 많은 이들이 상처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모가지가 여전하다니, 슬픈 일이다.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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