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지면 메꾸느라 정신없으니까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계속 총 맞으면서 다니는 거죠. ‘이거 막아, 저거 막아’ 이런 지시 받으면서. 외신들은 가뭄에 콩 나듯 단독 기사를 쓰지만 썼다 하면 ‘얘기 되는’ 기사들이잖아요. …”
세월호 사건을 취재한 현장 기자들의 대담 기사 중 한 부분이다. ‘기레기’(기자+쓰레기) 소리 들으며 취재하던 한국 기자들의 눈에 외신 기자가 부러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거다.
비슷한 기억이 있다. 1996년 검찰 출입 기자 할 때다. 기자와 검사가 폭탄주 돌려 마시며 서로 박수쳐 주는 걸 두고, 기자나 검사나 박수 받을 일이 워낙 없어 자기들끼리 저런다는 우스개가 나돌 때였다. <커리지 언더 파이어>라는 미국 영화를 봤다. 한 장교가 사건을 조사하다가 국방부가 덮으려고 하는 중요한 진실을 알게 된다. 어떻게 할지, 바에 혼자 앉아 고민하는데 옆자리에 중년의 기자가 와서는 명함을 주고 간다.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취지였을 거다. ‘당신이 무슨 고민 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기사를 쓰기 힘듭니다. 당신이 선택하십시오. 진실을 알리겠다는 마음이 서면 연락 주십쇼.’
멋있었다. 또 부러웠다. 아마도 그 기자는 꽤 오랫동안 그 사안을 취재하면서 장교를 지켜봤을 거다. 그러니 그가 자주 가는 바도 알았을 거다. 하지만 아무런 종용도 하지 않고 취재원의 선택을 기다린다. 결국 장교는 진실을 알리기로 하고 그 기자에게 연락한다. 장교가 그럴 거라고 확신해서 기다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취재하려면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이 건을 당장 터뜨리지 않아도 ‘밥값 못 한다’는 소리 듣지 않을 만큼 자신감과 이를 뒷받침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취재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건 제도적인 문제다.
그때 내 생각은 이랬다. 저 나라는 전문기자제가 돼 있고 출입처 발표 기사 의존도가 낮아서 저렇게 자유롭게 취재하고 탐사하고 특종 할 수 있을 거다. 반면 여기는 전문기자제가 안 돼 있고, 출입처 발표 기사 의존도가 높아서 저렇게 하기 힘들지만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사회가 좋아지면 저기처럼 바뀔 거다. … 그런데 바뀐 게 거의 없다. 출입처에 의존하는 취재 시스템도 그대로이고 기자들은 여전히 ‘지면 메꾸느라 정신이 없’다. 발표기사, 관급기사 의존도도 여전히 높다.
기자가 자긍심을 잃지 않으려면 자기 마음가짐과 노력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제도가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그 제도가 이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세월호 사건 뒤로 언론 문제에 대해서도 중지를 모으자는 말이 나온다. 무엇부터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쉽지가 않아 보여서 더 답답한 게 언론 문제인데, 좀 엉뚱해 보일지도 모를 사안 하나가 머리에 떠오른다. 언론인 해외연수 문제다.
기자들이 삼성, 엘지(LG), 에스케이(SK) 그룹이 낸 돈으로 1년 해외연수를 간다. 이것도 이십년쯤 돼 간다. 물론 모두 재단을 통해 법적 절차를 거쳐 연수자를 선발한다. 그런데 막상 선발을 앞두고 연수자들의 로비가 치열하다. 후배들 말을 들어보면 전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한 것 같지 않다. 머리 잘 돌아가는 기자들이, 통할 리 없는 로비에 몰두하지 않을 거다. 절차대로 한다지만 뭔가 문제가 있는 거다. 좀더 공적인 기관에 기금 운영을 맡긴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고쳐야 한다. 문제가 있는 줄 빤히 알면서 묵인해온 지 너무 오래됐다. 제도가 기자의 자긍심을 북돋아주지 못할망정 스스로 갉아먹게 하면 안 된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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