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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저항시를 읽으랴 / 이유진

등록 2014-06-15 18:13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유진 문화부 기자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온다면/ 밥은 함께 나누는 사랑// 밥은 함께 누리는 기쁨/ (…) / 이제 그 날이 오리라, 여기/ 그 나라가 오리라, 기다림// 목마르네 목마르네 목마르네’(고정희 연작시 <밥과 자본주의-민중의 밥> 부분)

시인 고정희의 해남 생가에 다녀왔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기독교인답게 시인의 방엔 ‘고행 묵상 청빈’이라 적은 친필이 걸려 있고, 책장엔 <한국민주문화대전집>(1978)이 꽂혀 있었다. 그 가운데 5권은 <한국의 여성운동>인데, 민주화와 기독교 토착화에 힘쓴 고 강원용 목사가 첫 장을 썼다. 두 사람은 고통받는 편에서 구원을 갈구했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해방과 평등의 종교였다.

반면, 믿음을 착취와 지배의 도구로 사용한 이들도 있다. 19세기 서양 선교사들은 조선인을 더럽고 미개하다 낙인찍으며 신앙으로 교화해야 한다는 제국주의 확장 논리를 폈다. 일제강점기 뒤에도 일부 지식인들은 이런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했다.

최근 지명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는 6·25와 남북 분단을 ‘하나님의 뜻’으로 봤다. 모든 일을 절대자의 섭리로 보는 종교인의 관점일 수 있다. 하지만 총리 후보자가 아닌가. 그의 말을 검토한 전문가들은 종교관을 떠나 그의 역사인식이 제국주의 파견 선교사들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며 크게 우려했다. 유림을 격분하게 한, “이조 500년 허송세월”이라는 언설도 일제가 날조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 닮았다. 식민사학의 선봉장, 우리 입장에서 보면 악질 어용학자였던 다카하시 도루는 조선 역사는 독립국가 역사로서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의 논문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가 책으로 발간했고, 훗날 ‘한국인 엽전론’, 맞아야 돈다는 ‘팽이론’ 같은 ‘민족성론’의 뿌리가 되었다. 문 후보자의 발언이 상하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헌법 정신을 거스르고 있다는 비난으로까지 번지는 이유다.

문 후보자는 본인 주장대로 친일 인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위안부 문제에서 특히 “나라 위신”을 내세우며 1965년 배상이 끝났으니 놔두자고 했다. 과연 그럴까?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은 1991년에야 비로소 처음 나왔다. 돈 문제로 깎아내릴 것만도 아니다. 그의 신념은 일본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해온 현 정권 입장과도, 국민 정서와도 맞지 않는다.

대체 왜 그럴까. 문 후보자는 제주4·3사건까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정리했다. 이는 법령에서 규정한 국가기념일로, 그것도 박근혜 정부가 지정했다. 사실조차 왜곡하는 극단적 반공주의다. 역시 국가가 기념하는 5·18 민주화운동마저 “광주사태”라고 일컬으며 무력진압을 용인한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시각”이 “감정적”이었다고 논문에 썼다. 이쯤 되면 확신이다.

4·16 세월호 참사 현장인 팽목항과 가까운 해남은 고정희 시인과 마찬가지로, 저항의 디엔에이를 물려받은 고 김남주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는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어떤 관료> 부분)이라고 썼다. 요즘 사람들이 최근 다시 이 시를 꺼내 읽는다고 한다. 무릇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왜 옛날 저항시를 꺼내들어야만 할까.

며칠 전 밀양 송전탑 행정대집행 때 한 할머니는 경찰에게 “느그들 우리 후손이야. 우리 편을 들어야지”라고 울부짖었다 한다. 거꾸로 가는 세상이다. 선조들한테 면목없고 후손들도 불쌍하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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