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아람 작가
통일에 접근하는 관점은 여러가지다. ‘통일 대박론’에도 진실은 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햇볕 정책’을 훨씬 좋아했다. 그 따뜻하고 품위 있는 감수성을 높이 샀다. 그리고 직관적이었다. 햇볕을 내리쬐는 것으로 꽁꽁 싸맨 적의 외투를 벗겨내겠다니! 제도권 정치에서 나온 것으로는 드물게 문학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명이었다.
더 진보적이면 관용의 가치도 더 잘 알까? 나는 그 역을 믿는다. 관용하는 사람이 진보한다. 보다 나아진다는 뜻은 아닐지라도. 그는 자리에서 움직인다.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간다. 그는 변화한다. 관용 경험의 최대치가 바로 연애다. 연애는 인간을 마음으로 유람하는 과정이고, 인간에 대한 견문은 연애의 넓이와 깊이만큼 달라진다. 영혼을 불안정하게 뒤흔드는 연애의 경험 없이 한자리에만 머무는 사람은 결국 발 디딘 땅 아래로 뿌리를 내려 박게 되어 있다. 그래서 보수성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것을 말한다. 거리를 두고도 인간을 관용할 수는 있지만, 관용의 영향력은 거리에 반비례한다. 어처구니없는 행동양식을 신문 기사에서 발견했을 때, 페이스북에서 발견했을 때, 내 친구 중에서 발견했을 때, 그가 내 애인임을 발견했을 때, 인간의 반응은 같지 않다. 어떤 문제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개념화된 윤리로는 인간의 세계관이 증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애인이 연루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세계관은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온몸과 온 정신과 온 삶으로 받아들여 할 사람,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때가 진정한 관용을 배울 기회다. 갈림길 앞에서 포기하고 손을 놓아버리는 사람은 연애를 했다고 말할 수 없다. 필사적으로 거리를 좁히는 과정에서 서로가 변한다. 영원히 변한다. 그들이 헤어져도 그들 서로가 바꾼 세계는 더 이상 전과 같지 않다. 적절한 때에 나타나서 나를 사로잡고 상처 입히고 변화시킨 사람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었을 거라고 믿는다. 한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혹은 관념으로 지지했지만 신변으로는 수용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나는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애인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였다.
나는 늘 나와 닮지 않은 사람을 찾았다. 다른 만큼 흔들렸다. 충돌의 크기만큼 배웠다. 고통만큼 빠져들었다. 한동안 연애를 못했더니 세계관이 경질화되는 것을 느낀다. 내가 아는 여자 중에 평생을 그래 왔던 사람이 있다. 터놓고 사랑할 기회가 없어서, 감옥 같은 자기 껍질에 갇혀 살아야만 했던 사람. 그녀의 외로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주변에 자주 말하고 다녔지만 공개적으로 밝히기는 처음이다. 나는 그녀와 연애하고 싶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싶고, 바꾸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거리를 좁히고 싶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스펙트럼이 이 세계에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녀에게 배운 색깔로 제대로 윤색하고 싶다. 반대로 나는 그녀의 견고한 세계에 작은 균열을 내고 싶다. 거기서 불가능이 싹틀지 지켜보고 싶다. 나는 김정일의 외투를 반쯤 벗겼던 햇볕을 그녀에게도 내리쬘 것이다. 정치적 입장과 나이의 차이가 커서 쉽지는 않을 테고 주변의 잡음도 많을 터다. 우리의 관계가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서로의 삶에서 가치와 의미가 있는 사건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대통령과 연애하고 싶다. 그녀의 답장을 간절히 기다린다. 더 익숙하다면 그녀가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도 괜찮다. 저 남자와 통일한다면, 그야말로 대박이라고.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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