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사람들은 뉴스를 통해 세상을 만난다. 뉴스를 통해 얻는 건 정보뿐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조간신문을 읽거나 뉴스를 보면서 그날 세상의 심정적 온도를 잰다. ‘아이고, 경사났네.’ ‘끔찍하구먼!’ ‘이놈의 지겨운 세상, 좀처럼 안 변해.’ 오래전에 한 미국 정치인이 “휴가 가서 뭐가 제일 좋았느냐”는 질문에 “신문 안 보니 천국 같았다”고 대답했다던가. 문명사회에 사는 한, 뉴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일 거다.
에스비에스 개그프로 ‘웃찾사’의 ‘엘티이(LTE) 뉴스’를 봤다. 앵커와 해설자가 나온다. 앵커가 읽는 뉴스는, 첫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해설자의 한마디 코멘트로 마무리된다. 그러곤 다음 뉴스로 넘어간다. “새 국무총리 내정자가…” “되면 얘기해!” “다음 소식입니다….” 이런 식의 거두절미로 정부에 대한 비판을 대체한다. 검찰 직원들이 뉴스에 출연해 유병언의 행방을 브리핑하려고 지도를 편다. 해설자가 묻는다. “어딨는지 모르죠?” 출연자들은 “예” 하고 바로 들어간다.
좀더 친절한 비판도 있다. “사교육비를 많이 쓸수록…” “명문대 가!” “이들은 결국…” “대기업 가!” “그러다 대한민국 교육은…” “산으로 가!” … “정부의 대처방식은 대학교 엠티에서 사고가 나면…” “엠티 없애고!” “해경이 잘못하면…” “해경 없애고!” “정부가 잘못하면…” “정부를 없…(말을 삼킨 뒤) 큰일 날 뻔했네.”
눈길이 가는 건 이런 정치적 풍자보다 이따금 보이는 세상에 대한 냉소적, 자조적 태도이다. “지구온난화가 갈수록 심각해…” “다 알아!” “빌 게이츠가 재산이 83조로…” “어쩌라고!” 녹화장의 방청객도, 나도 웃었는데 왜 웃었지? 단순명쾌한 과장법? 그것뿐일까? 그 웃음엔, 세상에 좋은 일이 없거나 좋은 일은 나와 무관하다는 느낌, 뉴스를 보면서 우리가 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새삼스런 자각도 조금 작용하지 않았을까?
언론사에 대한 풍자로도 읽힌다. “여러분, 이런 경우 있으셨죠?” “아니!” … “여러분, 주변에 이런 분들 계시죠?” “없어!” 어떤 뉴스인지 짐작도 못했는데 다음 뉴스로 넘어간다. ‘여러분’ 하고 시작한 앵커 멘트는 주로 기획 기사 앞에 붙이는 일종의 장식이다. 그걸 자르는 해설자의 멘트는 이런 말을 줄인 것 같다. “니네 무슨 보도 하려는지 다 알아. 그거 기사 없을 때마다 써먹는 거잖아.” 뉴스 편집회의 장면을 떠올려보자. 헤드라인 뉴스감이 없다. “국무총리 내정자 기사 올릴까요?” “되면 올려.” “유병언 수사 기사?” “행방도 모른다면서.” “지구온난화….” “다 알잖아.” “여기 기획기사….” “됐어!”
이 코너에서 보이는 뉴스나 세상은 재미있지 않다. 그걸 적발해내는 방식이 절묘해서 이 코너는 재미있다. 4년 전에도 뉴스와 세상의 재미없음에 착안해 재미를 끌어낸 코미디가 있었다. ‘뉴스유’라는 코너로, 두 남자가 뉴스를 진행한다. “뉴스유! 여고생들을 태운 수학여행 버스가 절벽 길을 달리다가…, 운전사가 버스 세우고 화장실에 갔슈.” “그게 무슨 뉴스여?” “알았어, 인마! 니가 원하는 대로 해줄껴. 뉴스유! 여고생들을 태운 수학여행 버스가 절벽 길에서 추락해 피바다가 됐슈. 이제 됐어, 인마? 속이 시원혀?”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혀.” 심심하지 않은, 충격적인 뉴스를 원하는 사람의 심리를 이렇게 꼬집었다.
4년 뒤, ‘LTE 뉴스’에선 이렇게 바뀌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또!” “다음 소식입니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