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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대중은 안다 / 박권일

등록 2014-07-14 18:34수정 2014-07-14 18:50

박권일 칼럼니스트
박권일 칼럼니스트
7월4일 <마이니치신문> 인터넷판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지난 2월 처음 방영되다 중단된 도쿄가스 광고가 뒤늦게 에스엔에스(SNS)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의 응원(母からのエール)’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 광고의 주인공은 한 취업준비생이다. 그녀는 구직활동을 열심히 하지만 번번이 불합격 통지를 받고 의기소침해진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지하철 맞은편에 면접관들이 앉아 있는 환각을 볼 정도다. 어느 때보다 면접을 잘 본 날, 그녀는 합격을 확신하며 케이크까지 사서 집으로 간다. 그러나 현관문 앞에 선 순간 불합격이라는 문자가 온다. 그녀는 집에 들어서지 못하고 동네 놀이터로 간다. 멍하니 그네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와서 등을 살며시 밀어준다. 엄마였다. 참았던 눈물이 터진다. 그녀는 엄마가 만든 냄비우동을 먹고 다음날 아침 다시 구직활동에 나선다.

서러운 풍경이다. 한국 사회도 꼭 닮았기에 더 공감이 간다. 그런데 정작 이 뉴스에서 내 눈길을 잡아끈 부분은 따로 있었다. 광고가 한 달도 못 가 중단되었다는 대목이다. 광고라 해도 선정적이거나 상업적인 영상이 아니라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내용이다. 왜 광고가 그렇게 금방 중단된 걸까? 이유는 “취업준비생의 모습을 너무 리얼하게 그려서”였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 시청자들이 그만큼이나 많았다는 얘기다.

우리들 대중의 모습을 이토록 명징하게 드러내는 에피소드가 있을까. 세계의 비참을 그대로 보여주는 텍스트는 아무리 탁월해도 큰 대중적 성공을 얻기 힘들다. 엄청난 인기를 얻는 작품들은 대개 선이 악을 이기고, 못생긴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재탄생하며 마무리된다. 디테일은 갈수록 리얼해지지만 서사는 언제나 판타지에 머문다. 혹자는 대중이 무지해서 그렇다고 간단히 냉소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들 대중이 현실적인 작품을 기피하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현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신물나도록 알고 있다. 갑의 횡포에 시달려야 하는 을의 공포를, 고통스럽도록 비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남루한 삶을…. 현실을 예리하게 도려내 보여주는 사회과학 서적보다 힐링 전도사와 인문학 멘토의 진부한 위로가 수십배 잘 팔리는 것 역시, 대중이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중을 현실도피만 한다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들 대중은 끊임없이 현실로 복귀해 현실을 변화시키려 발버둥친다. 단, 바꾸려는 현실은 사회가 아니라 자아(ego)다. 자기계발, 힐링·인문학 멘토링, 그리고 요즘 인기 있는 연애상담 같은 유행들은 ‘약한 자아’에 관념적 보형물을 집어넣는다는 의미에서 ‘자아성형산업’이다. 이 전도유망한 산업이 내세우는 비전은 시스템의 폭력을 버텨내고 승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자아’를 소유하는 것이다. 자아성형산업 역시 우리의 무지가 아니라 우리의 앎에 기생한다. 즉, 제도적·공적 해결방식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자양분 삼는다. 메시지는 명쾌하다. “사회를 바꾸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자아를 바꾸세요!”

우리는 현실을 알기에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현실을 알기에 자아성형에 몰두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더 잘 안다면’ 어떨까. 생때같은 아이들을 수장시킨 체제, 인간을 갈아 넣으며 굴러가는 자본주의에서 홀로 탈주할 수 없음을, 약한 자아일 수밖에 없음을 절실히 알게 된다면 어떨까. 끝내 우리는 자아를 바꾸는 대신 사회를 바꿀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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