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영 집필노동자
잭 런던의 소설 <강철군화>에서 화자인 에이비스는 교회에서 만난 지인에게 “정의(right)는 법과 관계가 있지 않나요?”라고 묻는다. 그는 “첫 글자를 잘못 썼어요”라고 답한다. “힘(might)이란 말인가요?”라고 에이비스는 다시 되물었다. 현실에서 힘과 정의는 잘 구별되지 않을 때가 많다.
원고 대필을 비롯하여 연구용역비 등의 문제로 오래전에 관계를 끊은 교수가 있다. 전국에 양심 없는 ‘김명수’는 많다. 당시 교수의 부당한 노동착취 때문에 내가 입을 열었을 때 아무도 내 옆에 없었다. 뒷담화에는 참여하던 사람들이 정작 제대로 문제제기를 하려 하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옳지 않은 줄 알지만 권력에 눌려 결국은 몸을 사리던 선배들을 보며 배신감의 쓴맛을 본 시절이었다. 시간강사 자리라도 유지하려면 함부로 학교에 밉보이면 안 되니까 그렇게 침묵하겠지 싶다가도 바로 그 침묵이 악을 활개치게 만든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했다.
부당한 착취 앞에 침묵하면서 같은 학교라고 뭉치면 그게 의리인가. 의리 열풍이라고 한다. 한 광고에서 시작된 요즘의 열풍이 아니더라도 이 의리가 호출되는 방식은 의아할 때가 많다. 의리는 옳음(義)을 다스리는(理) 행동이 아니라 주로 패거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써먹는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단지 같은 지역과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모임을 갖고 집단을 형성한다. 각종 향우회와 동문회가 그렇다. ‘의리를 지킨다’고 하면 옳은 길을 선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사람을 지킨다’는 뜻에 가깝다. 정의도 연대도 아닌 패거리다.
출판시장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와 <분노하라>의 ‘인기’에서 볼 수 있듯 한때는 정의와 분노가 마케팅의 열쇳말이었고 이제는 의리다. 패러디가 풍성하게 생산될 정도로 의리는 희화화되었다. “광고주는 갑 나는 으리니까”는 그저 웃긴 표현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현실을 함축하고 있다. 슬프게도 의리는 ‘을’(으리)로 둔갑되어도 무방할 정도로 ‘힘’과 결연관계를 맺고 있다. 의리가 연대와는 다른 이유다.
세월호 참사 생존학생들이 진상을 규명해달라며 걸어서 국회까지 갔다. 이 모습을 보고 따라나선 시민들, 저녁식사를 준비한 마을 주민들, 그들이 바로 이 ‘옳은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아닌가. 민족, 고향, 학교 등으로 얽힌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것은 일종의 인맥 보험이지 ‘옳은 길’과는 무관하다.
7월30일 치러질 재보궐선거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지역은 김득중 후보가 출마하는 평택이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득중은 그가 말했듯이 ‘살아남은’ 해고노동자다. 해고 이후 당사자를 비롯하여 가족들의 죽음이 이어졌다. 해고노동자의 국회의원 출마는 우리 삶의 모든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투쟁을 상징한다.
잭 런던은 <강철군화>에서 “이기적인 자본주의의 부패로부터 인류형제애 시대”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소설 속 시점인 27세기가 어떤 세상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인류형제애 시대’에 대한 낙관은 솔직히 어렵다. 생명이 존재하는 사회는 끊임없이 이해의 대립 속에 놓여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해 대립이 아니라 어느 한쪽의 힘이 너무나 압도적인 상황이다. ‘강철군화’ 밑에서 현재 우리는 대부분 ‘일시적 생존자’다. 어딘가에 의리가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거대한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을 때 그 싸움을 모른 척하지 않기, 홀로 버거운 싸움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곧 연대라고 믿는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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