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환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장·전 대법관
요즘 법원의 재심 절차에서 과거 긴급조치나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형사처벌을 받았던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사건이 수십건에 이른다. 이는 우리 사법부가 독재정권 시절에 권력을 견제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주는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법원은 입법권·행정권으로부터 독립해 권력을 견제하고 강자의 횡포로부터 일반 시민과 약자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사법부는 또한 존엄사와 동성결혼을 허용할 것인지, 근로자의 통상임금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범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의 사용을 금지할 것인지 등과 같이 사회의 근본적 가치선택에 관한 최종적인 판단을 내려주는 이른바 정책법원의 기능을 담당한다. 사법권 행사의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그 기능을 행사함에는 다수자나 강자의 입장을 따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수자나 약자의 입장까지를 두루 반영한 정의로운 가치결정을 해내야 한다.
대법원이 이런 기능을 발휘하려면 대법관 전원이 참여한 합의체에서 치밀한 법리논쟁을 거쳐 결론을 이끌어내고, 대법관 전원의 의견이 판결문에 제시되는 전원합의체 판결 방식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전원합의체 방식이 가능하려면 10명 안팎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단일한 합의체 운영이 불가피하다. 토론이 불가능할 정도의 다수 대법관으로 구성된 대법원은 한두 마디씩의 찬반 토론 뒤에 단순 표결을 거쳐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는 다수자와 강자의 입장만 반영될 뿐, 다수와 소수의 입장이 두루 조화된 정의롭고도 지혜로운 결론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단순 다수결로 판결을 한다면 유신정권 당시에 긴급조치가 위헌·무효라는 판결을 할 가능성이 1%라도 되었을까 생각된다.
개개 법률적 분쟁에서 당사자의 정당한 권리를 찾아주는 이른바 권리구제 기능의 강화를 위해 대법관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대법원이 권력견제 기능과 기본적 가치질서 형성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려면 소수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단일합의체 모습 외에 다른 모습을 취할 수는 없고, 그 수의 대법관으로 연 4만건에 가까운 상고사건의 권리구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법관 수를 서너배로 늘린다 하더라도 그 사정이 질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대법원은 권력견제 및 정책법원의 기능과 일반사건에서의 권리구제 기능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그중 후자는 대법원이 아닌 다른 법원에서도 수행할 수 있는 반면에 전자는 전원합의체로 운영되는 대법원에서만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단일 합의체 판결로 힘과 권위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막강한 국가권력과 사회세력에 대항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일반사건의 권리구제를 위한 상고심의 역할은 대법원이 아닌 다른 법원에서 수행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하급심 법관의 대폭 증원 등으로 하급심을 강화하는 것과 동시에 중요 사건에 한해 상고를 허용하는 상고제한제가 바람직할 것이다. 당장 그것이 어렵다면 일반 상고사건을 담당할 별도의 재판부를 설치해 대법원의 업무로부터 이를 분리해내는 것이 차선책이 될 것이다.
일반 상고사건 처리에 급급한 나머지 대법관을 증원함으로써 대법원의 권력견제 기능과 정책법원 기능이 약화되는 결과가 초래된다면, 이는 권력분립의 이념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함으로써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박시환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장·전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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