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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드레스덴 선언, 이걸 받으라고? / 황재옥

등록 2014-07-30 18:31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원광대 초빙교수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원광대 초빙교수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월28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북한에 세가지를 제안했다. 그런데 북한이 즉각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최근까지 드레스덴 선언과 관련된 것이라면 거부반응부터 보인다. 드레스덴 선언이 점점 천덕꾸러기가 되어 가는 형국이다.

북한의 현실을 고려하면 드레스덴 선언은 북한이 그렇게 싫어할 내용은 아니다. 첫째, 남북한 주민들의 인도적 문제부터 풀어 나가자. 둘째, 남북한 공동번영을 위한 민생 인프라를 함께 구축하자. 셋째 남북 주민간 동질성을 회복해 나가자. 일단 나쁜 얘기가 없다. 그런데 북한이 극력 반발을 하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제안의 도입 부분부터 북한의 자존심에 큰 생채기를 줬다고 본다.

“저는 최근 외신 보도를 통해 북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경제난 속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거리에 방치되어 있었고, 추위 속에서 배고픔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자유와 행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세계의 눈과 귀가 집중되는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이렇게 북한의 무능을 비판한 뒤에 세가지를 제안했다.

국가지도자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살짝 우회적인 표현을 썼더라면 북한이 첫날부터 그렇게 반발하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에는 북한을 경제적으로 돕겠다는 우리 입장이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표현 속에 녹아 있다. 속담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표현 속에는 이미 북한이 우리보다 못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필자는 박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지원 취지가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표현이 달라지니까 북한이 자존심 때문에 받고 싶어도 못 받게 된 것이다.

두번째 제안도 표현과 달리 북한이 거부감을 보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농업생산의 부진과 산림의 황폐화로 고통받는 북한 지역에 농업, 축산, 그리고 산림을 함께 개발하는 ‘복합농촌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남북한이 힘을 합해야 합니다.” 이 대목은 북한에서 신성불가침인 김일성 주석의 ‘주체농법’을 몰아내고,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농법’을 북한에 밀어 넣겠다는 뜻으로 읽혔을 것이다.

민간단체의 대북사업들이 줄줄이 드레스덴 선언을 이유로 거절당하고 있다. 6월26일 산림 병충해 방제 작업을 합의해 놓고도, 북한은 7월14일 그것이 드레스덴 선언의 일환라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는 이유로 합의 자체를 파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7월15일 “드레스덴 선언의 이행 차원에서 진료소, 온실, 낙농 지원 등 분야에 남북협력기금 30억원을 지원할 테니 민간단체들은 응모하라”고 했다. 이날은 통일대박론에 따른 통일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킨 날이다. 그리고 통일대박론에 대해 북한은 흡수통일론으로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 결국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생색만 낼 뿐, 실제는 북한이 거절할 수밖에 없도록 사전에 준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대로 가면, 북한은 앞으로 드레스덴 선언의 ‘드’자만 나와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것이다. 대북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그 제안에 대한 외국 정상들의 외교적 찬사가 아니다. 상대방의 암묵적 동의와 협조가 중요하다. 북한의 자존심을 짓밟고 정체성을 무시해 가면서 우리 대북정책을 밀어붙이려 하면 소리만 나고 성과는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독일까지 가서 맘먹고 발표한 선언을 ‘비운의 드레스덴 선언’으로 만든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도 책임 소재를 따져 봐야 할 일이다.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원광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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