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화랑 백자전 2층 전시장에 진열된 백자달항아리. 어떤 이는 잘생긴 맏며느리를 보는 듯한 흐뭇함이 있다고 했고, 어떤 이는 잘 만든다는 것을 초월한 도공의 무심의 경지를 말했다. 사진 필자 제공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부터 보는 것이 내 일상의 시작이지만 요즘은 신문 보기가 겁나 점심 무렵에나 뒤적거리다 만다. 나라 안팎에서 들려오는 소식이라곤 억울하게 죽고 무자비하게 죽이는 사건 사고의 연속이어서 우울하기만 하다.
무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요즘 세상에서 유식하게 말하는 힐링이라는 것을 해야겠다. 본래 힐링이란 테라피라고 하는 치료와 달라서 장기적인 것, 본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을 말한다. 미술 테라피가 아니라 미술 힐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미술 감상을 통해 정서적 위로를 받는 것이 된다.
미술이 갖고 있는 사회적 효용 가치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론이 있지만 미술 감상이 인간적 정서를 함양하는 데 훌륭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론이 없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투철한 작가 정신이 들어 있는 회화보다 도자기를 감상하는 것이 훨씬 더 정서적으로 위안을 받게 된다.
도자기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도자기를 보면서 잘생겼다, 멋지다, 아름답다, 우아하다, 귀엽다, 앙증맞다, 호방하다, 당당하다, 수수하다, 소박하다 등등 본 대로 느낀 대로 말하곤 한다. 그런 미적 향수와 미적 태도를 통해 우리의 정서는 순화되고 힐링된다.
특히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빠진 마니아는 많고도 많다. 스스로 백자광이라 일컫는 이도 있고, 대대로 수많은 문사들이 미문으로 백자를 예찬했다. 미술사가로는 최순우, 김원용, 화가로는 김환기, 시인으로는 김상옥, 애호가로는 박병래의 글이 아름답고 이분들의 안목에서 배울 것이 많다. 일본인 중에도 우리 백자를 예찬한 분이 많은데 그 대표적인 예가 야나기 무네요시이다.
그는 한·중·일 동양 3국의 도자기를 비교하면서 조형의 3요소는 선, 색, 형태인데 중국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은 색채가 밝고, 한국은 선이 아름답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중국 도자기의 형태미는 완벽함을 강조하고, 일본 도자기의 색채미는 깔끔함을 보여주는데 한국 도자기의 선은 부드러운 곡선미를 자랑한다고 했다.
그래서 중국 도자기는 저 높이 선반에 올려놓고 보고 싶고, 일본 도자기는 옆에 놓고 사용하고 싶어지는데 한국 도자기는 어루만져 보고 싶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 따뜻한 친숙감과 사랑스러운 정겨움이 조선백자의 특질이다.
조선백자 중에서도 18세기 영조 시대에 금사리가마에서 만들어진 달항아리, 높이 한자 반(45㎝) 이상 되는 백자대호는 불가사의한 매력으로 우리 백자를 대표한다. 달덩이 같은 이 백자항아리는 커다란 왕사발 두 개를 이어붙여 만들었기 때문에 기하학적인 동그라미가 아니라 둥그스름한 볼륨감만을 보여줄 뿐인데 그 어진 선맛이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최순우는 달항아리를 보면서 잘생긴 부잣집 맏며느리를 보는 듯한 흐뭇함이 있다고 했고, 김원용은 잘 만들겠다는 욕심조차 없던 도공의 무심한 경지를 읽어냈다. 미술 감상이란 결코 미술사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국미술사를 공부해야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외국인도 마음을 비우고 보면 이런 것이 보인다.
2009년 영국 왕실의 보물창고 격인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에서는 저명인사 5명에게 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중 가장 맘에 드는 것 한 점만을 골라보라는 어려운 숙제를 냈다.
그 저명인사 5명 중에는 영화 ‘007 시리즈’에서 ‘마담 M’ 역으로 유명한 주디 덴치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 박물관에 소장된 우리 현대도예가의 달항아리 작품을 꼽으면서 그 감상을 이렇게 말했다. “하루 종일 이것만 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보고 있자면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올여름 우리 미술계에선 무슨 약속이나 한 듯이 백자항아리 특별전이 세 곳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서울 신사동 호림박물관에선 ‘백자호’ 특별전의 제2부 전시(10월30일까지), 평창동 가나화랑에선 백자대호전(8월30일까지), 구기동 서울미술관에선 ‘백자예찬’(8월31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호림박물관에서는 제1부 순백자 항아리 전시에 이어 청화백자, 철화백자 등 문양이 새겨진 조선시대의 크고 작은 항아리 100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내게 명품 한 점만 고르라고 하면 역시 우아하고 품위있기로 유명한 국보 제222호 ‘청화백자 매죽문 항아리’이다.
가나화랑의 전시에는 보물 제1438호, 제1439호 달항아리 두 점을 비롯하여 사랑스러운 연적, 필통, 붓꽂이 등 조선시대 문방구들도 출품되었다. 그중 한 점만 고르라면 2층 전시장 첫머리에 있는 아직 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당당한 자태의 달항아리이다.
그런가 하면 서울미술관에서는 백자항아리와 함께 이를 현대미술로 재해석한 화가들의 흥미로운 회화·조각·도예 작품들도 전시되고 있다. 그중 한 점을 고르라면 무조건 수화 김환기의 전설적인 작품 <항아리와 매화>이다.
그러나 만약 내게 한 점 가져가라고 한다면 선택이 달라진다. 가나화랑의 ‘청화백자 술잔받침’이 꼭 맘에 든다. 이 술잔받침에 쓰여진 시를 읽어보니 금주를 선언한 내 친구의 괴로운 마음이 생각난다.
올해로 들어서니 술 마시고 싶은 병이 갑자기 도진다/ 금주로 인해 오히려 생긴 병이 왜 이리 심한가/ 금주를 하면 병이 없다는 것은 잘 알겠지만/ 술을 못 마셔 또다른 근심병이 생기니 금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네.
전시장을 순례하며 이처럼 아름다운 백자들을 느긋이 감상하고 나니 내 가슴속에선 두 가지 확신이 선다. 하나는 백자는 영원한 우리들의 아이콘이라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전시회를 찾아가서 미술을 감상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힐링이라는 생각이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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