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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어떤 인문학 / 이유진

등록 2014-08-10 19:17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유진 문화부 기자
미국 사회비평가 얼 쇼리스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인문학 교육과정인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었다. 어느 여성 재소자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문학 교육이 필요하다고 한 말을 듣고서다. 세상이 왜 이렇게 절망적인지, 나는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지, 이런 고민을 하는 나 자신은 누구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문학은 이처럼 화두를 붙잡고 걸어가는 성찰의 과정, 비판적인 학습이다. 쇼리스는 그런 인문학으로 약자들이 시민정신과 자유를 얻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며칠 전 문화융성위원회 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도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군대 폭력과 학교 왕따 같은 문제는 어려서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인문 교육을 강화해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재소자부터 대통령까지 모든 사람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중병에 걸렸을 때 아무 의사나 찾지 않듯, 지금 같은 야만의 시대에는 ‘어떤 인문학’이냐가 더 중요하다. 인문학이 해방의 학문이 아니라 돈벌이나 통치의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수백억원에 이르는 정부 예산이 인문학 중흥 정책에 투입됐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예컨대 한국연구재단은 최근 28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하면서 교육부와 협의 아래 한국사 연구 주제지정 공모사업을 발표했다. 특정 주제를 정해 학자들의 자율성을 배제한 것도 이상한데 내용을 검토해보니 난데없이 ‘다이내믹 코리아’의 원천을 탐색하라는 주문도 있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판에 한문 책 뒤져가며 그 ‘원천’을 찾으라니. 그냥 정책연구를 의뢰하면 될 터인데 재단을 통해 이런 과제를 공모하는 것부터가 미심쩍다.

‘문화융성’이란 미명 아래 국수주의를 자극하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닌지, 허울 좋은 인문학 정책으로 코드에 맞는 연구만 지원하려는 건 아닌지 지켜볼 일이라며 냉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디테일에 있는 악마’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못 본 척하면서 인문학의 도구적 사용에 박수치는 곡학아세의 무리, 돌팔이 선생들도 더러 보인다. 처세서를 본다고 저절로 성공하지 않듯, 공부깨나 했다고 해서 모두가 인문적 인간이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얼 쇼리스는 살아생전 한국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세계 인문대학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국이 지적으로 우수하고 민주화를 추진해낸 ‘시민의 힘’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안하지만 지금 이 나라는 그런 인문정신의 힘이 부족해 보인다. 쇼리스의 인문학은 ‘위험한 시민’을 만들었지만, 지금 한국은 제대로 된 학습자인 위험한 시민은 배제하고, 권력에 존경심을 표시하는 시민한테만 성원권을 주고 있다. 돈 때문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여전히 금전을 숭상한다.

서점에는 질 좋은 번역서들이 즐비하고, 대중 인문학 강좌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이런 경향은 자발적인 시민 인문학, 공공 인문학의 형성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인문학 유행이 자기계발을 위한 지식상품과 그의 소비로만 환원되는 것을 경고할 때가 된 것 같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단식만 봐도, 궁극적 질문을 던질 줄 아는 학습된 시민이 어떤 고통 속에 놓일 수밖에 없는지 생생히 알 수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며 외면하고, 세상에 순응해 살자고들 한다. 하지만 그렇게 돈만 쫓으며 살다가 우리 삶은 이 지경이 됐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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