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영 집필노동자
연일 들려오는 군대 내 폭력과 자살. 그야말로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극도의 억압적 체제 속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전시를 대비하여 동원된 군인(이자 민간인)들은 전쟁이 아니어도 죽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전쟁’은 권력의 위계질서를 만들어 모든 ‘자잘한’ 폭력을 수면 아래로 잠식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다. 일상과 전쟁의 경계가 모호한 이유다. 이 와중에 대통령이 내놓은 해법은 ‘인문학’이다.
문화융성위원회의 ‘인문정신 문화의 진흥방향과 정책방안’에 관한 논의 자리에서 대통령은 “사회적 문제인 군대 내 가혹 행위와 인권 유린, 학교에서의 왕따와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 방안”을 인문학에서 찾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국민들을 인문학을 통해 계몽할 대상으로 삼고 있어 불편하다. 민주국가의 공복의 자세가 아닌 마치 봉건시대의 군주의 역할을 자임하듯 인문학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백성’을 다스리려 한다. 게다가 장병들의 “마음속의 문제를 치유할” 목적으로 인문학이 동원될 때 권력에 의해 발생되는 폭력에 대한 근본적 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세월호 사건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유병언’이라는 귀신같은 존재를 여전히 쫓고 있다. 마찬가지로 군대 내 폭력 문제는 한명의 병사를 ‘살인자’로 만들기에 급급하다. 난관 앞에서 영웅을 기대하는 마음의 이면은 바로 처형당할 악마를 필요로 한다.
한명의 영웅이 승리의 역사를 쓰지 않듯, 폭력은 개별적인 악마에 의해 벌어지는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제나 내 주변을 맴돌고 때로는 내 안에서 발현되기도 한다. 폭력은 권력의 구조와 밀접하다. 성별, 나이, 직업, 직위 등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유연하게’ 변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흔하다. 평소에 아주 친절했지만 식당에서 음식이 늦게 나오자 직원에게 반말로 소리 지르는 사람을 본 적 있다. 사람이 달리 보이는 순간이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인간은 수시로 ‘만만한 대상’ 앞에서 힘을 휘두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폭력은 가해와 피해라는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촘촘하게 짜인 권력의 미시적 연결망에 의해 가해자와 피해자는 ‘상황’에 따라 바뀌곤 한다. 그래서 권력에 의한 폭력은 무력함과 야만성을 동시에 지닌다. 영화 <구타유발자들>은 바로 이 점을 다룬 작품이었다. 한때 폭력 가해자였던 문재(한석규)가 경찰이 되어 폭력사건 현장에서 마주한 사람은 과거 자신에게 괴롭힘을 당한 사람이었다. 극중 가장 악질적이던 봉연(이문식)은 바로 문재에 의한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 또한 어이없게 죽는 문재는 권력의 잔인함과 허망함 사이를 오간 인물이다.
구타당한 병사는 어떻게 구타의 가해자가 되는가. “초점은 장군이 아니라 하급 장교들, 하사관들, 내 안에 있는 병사, 심술궂은 자이며, 이들 각각은 나름대로 성향들, 극들, 갈등들, 힘의 관계를 갖고 있다 …(중략)… 억압당하는 자가 억압의 체계 속에서 항상 능동적인 자리를 취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은 마조히즘이 아니라 바로 이 미시적 짜임이다. 부유한 나라의 노동자들은 제3세계에 대한 착취, 독재자들의 무장, 대기 오염에 능동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에서 인용) 폭력 사회에서 인문학은 개인의 ‘마음 치유’보다는 권력의 이 미시적 짜임을 아프게 들춰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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