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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부조리할 권리 / 손아람

등록 2014-08-20 18:55

손아람 작가
손아람 작가
특권(privilege)은 라틴 어원으로 개인에게만 예외적으로 적용되는 법(private law)이란 뜻이다. 법을 명문화된 조리라고 한다면, 특권은 부조리할 권리다. 모두가 줄을 서야 한다고 배우는 사회에서 즉시 입장할 권리가 바로 특권이다. 그런데 특권의 존재는 부조리하지만, 특권의 행사는 철저히 합리적이다. 사회가 용인한 부조리의 범위에서 이득을 최대화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특권의 딜레마다.

국내 항공사들은 비즈니스석 이상 승객이 원할 경우 라면을 제공한다. 컵라면이 아니라 집에서 끓여낸 듯한 그릇 라면을. 그래서 땅에서는 대표적인 서민 요리였던 라면이 하늘에서는 특권으로 변한다. ‘하늘에서 끓인 라면’은 비즈니스석 탑승 경험의 상징과 같아서 한시간에 걸쳐 서빙되는 풀코스 정찬을 물리고 라면을 주문하는 승객들이 종종 있다. 특권의 외관에 그렇게까지 예민한 승객이라면 아마 땅에서는 라면을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비행이 끝나면 라면의 지위는 추락한다. 이것이 면발이 제대로 익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무원에게 행패를 부린 ‘라면 상무’ 사건의 배경이다.

대한항공은 최근 ‘라면 상무형 기내 폭력’을 회사 차원에서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옳은 결정이지만 승객의 매너를 갑자기 처벌하는 것으로 충분한지 의문이다. 특권은 쌍방향의 사회적 약속으로 성립한다. 왜 비행승객은 무례하게 돌변하는가? 질문의 답은 오히려 항공사가 승객 폭력에 무대응해왔던 이유에 있다. 승무원에게는 승객의 특권에 대응하는 특무가 존재한다. 서비스 고시라고까지 불리는 항공승무원 취업준비생들은 복잡한 서비스 규정과 구체적인 접객 매뉴얼을 공부하는데, 그 압권은 승객이 규정 위반을 고집하는 경우다. 이때 승무원은 규정대로 딱 잘라 거절하는 대신 융통성 있게 응하길 권장받는다. 왜일까? 아무리 대중화되었어도 여전히 항공 상품의 경쟁력은 서비스 특권의 제공에 달렸기 때문이다. 이동 그 이상인 비행기의 승객은 기차나 버스 승객과는 달리 ‘적당한 수준의 부조리’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라면 상무는 정온정압의 끓는점에서 익은 면발의 식감을 감지할 만큼 과학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부조리의 범위와 한계, 그리고 함부로 거스를 수 없는 승무원의 입장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사건이 언론에 흘러나가는 이변을 예측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는 불합리한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부조리의 행사만이 그에게 주어진 특권을 증명하기에 부조리하게 행동했다. 이 부조리극의 가장 부조리한 측면은 바로 가능성이다. 우리 모두에게 라면 상무와 같은 부조리할 권리가 허용된다면? 누구도 부조리하게 행동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모두에게 허용되는 권리는 특권이 아니니까. 그러므로 모두가 하늘에서 라면을 먹는 세상에는 라면 상무가 없다. 거기서는 승무원에게 속옷을 빨아달라고 떼를 쓰는 빨래 상무가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법의 예외를 법으로 용인하는 것에서 시작된 특권의 개념은 이제 너무 당연해져서 오직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세계를 부조리하게 굴절시키는 효과를 체감할 수 있는 지경이 됐다. 재난 영화에서 탈출의 순서가 특권화될 때의 갈등이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이유다. 좀더 가깝게 예를 들면 이런 순간이다. 고도 만미터 상공에서조차 라면의 끓는점을 정온정압의 조건으로 관리하는 엄격한 합리성이, 수백명이나 되는 승객을 태운 선박의 안전에는 적용되지 않는 때.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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