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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고전과 터무니없는 책 / 김홍민

등록 2014-08-27 18:43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처음 만난 상대방의 취향 내지는 교양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당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은 어떤 겁니까”라는 질문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요즘 같은 때에 누가 이런 걸 묻겠나 싶겠지만, 명색이 출판 편집자여서 그런지 나는 지금까지도 심심치 않게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대답은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한때는 무난하게 넘어가고 싶은 마음에 고전을 주워섬겼다. 헤밍웨이, 카프카, 보르헤스 같은 작가들 말이다. “요즘 도스토옙스키를 다시 읽고 있는데 너무 좋더군요”라는 정도가 딱 적당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읽었는데”가 아니라(처음이면서) “다시 읽고 있는데”라고 말했을까.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읽는다고 얘기하려니 뭔가 창피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창피한 기분이 들었느냐. 자격지심일 가능성이 크다. 한데 ‘고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탈로 칼비노가 내린 첫번째 정의를 보니 이런 식으로 대답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왜 고전을 읽는가>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즉, 그가 보기에 ‘다시’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궁색한 위선”을 드러내는 부사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고전에 관한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때였다. 여름방학을 맞아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목록의 절반은 위인전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고전문학이었다. 그때 내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택했던 책은 <모비딕>이었다. 나는 이 책을 방학 내내 붙들고 있어야 했다. 문제는 읽기는 읽지만 내가 뭘 읽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는 거다. 읽다가 남은 페이지를 확인하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겹기 짝이 없었다. 해설을 베껴서 독후감은 썼지만 덕분에 나는 한동안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두번 다시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다시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게 된 건 중학교에 진학하고 무협지에 푹 빠지면서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하루 종일 김용의 <영웅문>을 붙들고 살았다.

사회에 나와서 책깨나 읽는다는 이런저런 사람들과 어울릴 일이 많은데, 여느 자리에서는 듣기 힘든 독창적인 견해를 개진하거나 ‘대관절 어떻게 저런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거지?’ 하고 감탄하게 되는 상대를 만나면 혹시나 싶어 “당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은 뭔가”를 물어보곤 한다. 이른바 ‘사회적으로 핍박받아 온 책’들을 어려서부터 탐독해 왔다는 대답이 많았다. 에스에프나 판타지, 특히 만화 따위 말이다. 그런 인간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김없이 부러운 마음이 든다. 나에게도 누군가 그런 ‘터무니없는 책(이라고 평가받는)’들을 일찌감치 권해주었더라면 내 사고의 폭이 지금처럼 옹색하진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고전의 중요성을 부정하자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터무니없는 책’으로 채워진 추천도서 목록 같은 걸 구경해 보고 싶다. 혹은 지상파의 책 소개 프로그램에 나온 ‘셀레브리티’가 라이트노벨을 척 꺼내들며 “최근에 이 책을 읽고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떴다”는 식으로 얘기해 주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상상도 해본다. 음, 그랬다간 진지한 시청자들의 항의로 프로그램이 폐지되려나.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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