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2300년 전 맹자의 말에서처럼 세월호 유족들은 ‘이’(利)를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義-진상 밝히는 일)를 말하고 있다. 그 정의가 아니고서는 세월호 참사와 특별법 교착이라는 이중의 우울에서 우리가 벗어날 길은 없다.
이럴 수는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국민의 가슴에 메아리친 것은 이런 참사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꽃다운 목숨들이 수장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 했던 한국인에게 그 사고는 사회 전체를 깊은 우울에 빠트린 거대한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때 우리는 가슴을 치며 다짐하지 않았던가. “안 돼,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돼.” “이번만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원인과 책임을 철저히 밝혀야 해.” 그러나 사고 발생 다섯 달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다. 원인 규명은커녕 조사를 담당할 특별위원회조차 만들지 못한 상태다. 무능이라면 이런 무능이 없고 마비라면 이런 마비가 따로 없다. 지난봄의 다짐들을 벌써 다 잊어버렸나, 아직 가을도 아닌데?
이런 마비와 무능은 사람들을 다시 깊은 우울에 빠트리고도 남는다. 지금 우리는 이중의 우울에 빠져 있다. 세월호 참사 자체가 첫번째 우울이라면, 그런 참사의 재발을 막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회가 해결력의 마비를 보인다는 것은 사람들을 슬프게 하는 두번째 우울이다. 이 이중의 ‘멜랑콜리’는 사회의 활력을 파괴하고 사람들의 가슴과 정신을 병들게 한다. 풀어야 할 것을 풀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행복할 수가 없다. 어깻죽지는 내려앉고 팔다리는 무겁고 얼굴은 그늘에 잠긴다. 가슴은 답답하고 영혼은 슬프고 정신은 순간순간 아픔의 기억 앞으로 호출된다.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해도 신명이 나지 않고 어떤 일을 해도 즐겁지 않다. 마땅히 풀어야 할 일을 풀지 않고 해결해야 할 일을 해결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종종 경험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집단적 불행감, 혹은 집단죄의식이다.
세월호 유가족 쪽과 특별법 문제를 놓고 해법을 찾고 있는 여당 쪽 사람들에게 내가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무슨 특별한 당부가 아니고 그냥 보통 사람들이 다 아는 내용의 충고 같은 것에 불과하다. 첫째,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달라는 것이다. 그 이해의 핵심부에는 ‘우울’을 벗어나려는 유족들의 절절한 기원과 기도가 있다. 유민이가 왜 죽어야 했는지, 왜 건우와 수현이와 그 친구들이 울면서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아야 했는지 그 진짜 이유를, 그 진상을 밝히지 않고서는 그들을 저곳으로 보내줄 방법이 없다고 유족들은 생각한다. 이것이 그들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요구하는 진정한 이유다. 여기서 진실 규명은 유족들이 죽은 자녀들에게 지고 있는 빚이며 책임이고 의무다. 그 진실을 아이들의 영전에 보여주지 않고서는 그들을 편히 잠들게 할 수 없고 유족들도 평생 ‘우울’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그들은 느끼고 있다.
특별법 교착상태를 뚫고자 하는 여당 사람들은 만에 하나라도 ‘마키아벨리의 아이들’ 같은 계산법에 기댈 것이 아니라 고색창연하면서도 항구한 지혜를 담은 ‘맹자의 자문’을 참조하는 것이 낫다. 이것이 나의 두번째 당부사항이다. 마키아벨리는 현실정치에는 패권적 통치술을 동원하는 것이 좋다고 권고한 사람이다. 유능한 정치인은 거짓말을 해야 하는가? 마키아벨리 왈, “물론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교활하고 비루하며 그들 스스로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군주는 그들을 상대로 발행한 약속사항을 지킬 필요가 없다.) 유능한 군주는 정적을 무자비하게 거꾸러트리고 배신하고 제거해야 하는가? 마키아벨리 왈, “물론이다.” (토머스 홉스의 ‘자연상태’처럼 마키아벨리에게 정치는 항구한 전쟁상태와 같으므로 품위, 존경, 예의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기원전 320년께 위나라를 방문한 맹자에게 위왕 양혜가 국정자문을 구한다. “선생께서 불원천리로 이 나라를 찾아주셨으니 한 말씀 가르쳐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습니까?” (기원전 3세기의 이 질문은 지금 이 시대, 곧 21세기에도 여전히 지배적 질문이다.) 질문에 대한 맹자의 대답은 짧고 단호하다. “왕께서는 어째서 하필 ‘이’(利)를 말하십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는) ‘이’가 아니라 ‘인과 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초면의 타국 왕을 거침없이 타박하는 듯한 맹자의 기개와 배짱이 놀랍다. 그가 이런 배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인의에 입각한 왕도정치론에 대한 확신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정치가 인의만으로 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은 왕도정치의 시대도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있다. 맹자가 경고했듯이 ‘이’에 대한 일방적인 경도와 집중이 현대 정치를 병들게 하고 현대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의는 인간 세계 어디서나 지금도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정치의 토대다.
세월호 유족들이 사고 진상을 밝히려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다. 무슨 다른 정치적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고 다른 이해관계가 있어서도 아니다. 2300년 전 맹자의 말에서처럼 세월호 유족들은 ‘이’(利)를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義-진상 밝히는 일)를 말하고 있다. 그 유족들을 마치 보상금 투쟁이나 하고 있다는 듯한 시선으로 흘겨보거나 과거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전가 보도처럼 써먹어온 사고처리법(“이 정도 줄 테니 그냥 돈이나 받고 물러서라”)을 이번에도 적용하려 한다면 그건 번지를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은 것이다. 여당 사람들이 유념해야 하는 것은 진솔한 마음으로 유족들의 ‘품위’를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문제다. 유족의 진심이 무엇이고 그들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지는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다. 그들의 이런 마음을 깊게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지금의 교착상태를 푸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일이 아니라면 물속에 사라져 간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유족들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한 ‘정의’도 바로 그 진상 규명이라고 유족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동안 십자가를 지고 수없이 팽목항을 오가면서 그들이 눈물 속에 거듭거듭 다진 것도 바로 그 정의라는 것을 정치권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정의를 존중해주는 일이야말로 유족에 대한 책임일 뿐 아니라 국민 전체에 대한 예의라는 것도 정치권은 알아야 한다. 그 정의가 아니고서는 세월호 참사와 특별법 교착이라는 이중의 우울에서 우리가 벗어날 길은 없다.
맹자와 제선왕의 대화(<맹자> 공손추장구)도 지금 우리 맥락에서는 아주 요긴하다. 왕이 묻는다. “저 같은 사람도 백성을 보호하고 민생을 편안케 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무슨 근거로 그리 말씀하십니까?” 맹자는 제선왕이 어떤 인간인지 들어서 알고 있다. 한번은 누가 소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본 제선왕은 그 소가 죽을 곳으로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놓아주어라”고 명한다. 맹자는 말한다. “왕께서는 소가 죽을 곳으로 끌려가는 것을 차마 그냥 볼 수가 없어 놓아주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이면 충분히 왕도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맹자의 유명한 윤리학이자 심성론이 된 “모든 사람에게는 차마 남을 해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人皆有不忍人之心)는 대목의 일화다. 소가 끌려가는 것도 차마 볼 수 없어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맹자가 말한 그 마음-그것은 어찌된 셈인지 현대 한국에서는 매말라 버린 마음, 그래서 우리 사회가 목말라하는 연민, 동정, 공감(empathy)의 마음 그거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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