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고바야시 히데오 평론집-문학이란 무엇인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지음, 유은경 옮김, 도서출판 소화, 2003
<고바야시 히데오 평론집-문학이란 무엇인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지음, 유은경 옮김, 도서출판 소화, 2003
“회의(懷疑)는 예지(叡智)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지가 시작되는 곳에서 예술은 끝난다”는 멋진 말로 시작하는 이 책은 끝까지 멋지다. 한 줄도 놓치기 싫을 땐 외우면 된다. 일본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1902~1983)에서 넘어지는 경우가 꽤 있으리라 생각한다. 독특한 사유 방식으로 당대에는 거의 수용되지 못했지만 무궁한 깊이의 실력자의 매력은 영원하다.(도요타 자동차를 분석한 사람은 동명이인이다.)
나는 그의 캐릭터가 좋다. 그는 지금 우리 사회의 리더십인 약지노둔(弱志魯鈍, 비겁하고 멍청한)에, 욕심만 많은 인간형과 대척한다. 약지노둔은 그가 인텔리를 언급하며 묘사한 표현.
저항으로서 죽음이나 세월호 같은 사고가 났을 때 “죽음의 굿판”을 필두로 “시체 장사”까지, 피해자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탈정치를 갈망하는 이들의 극도로 정치적인 발언의 괴저를 해부한다. “어머니에게 역사적 사실은 아이의 죽음이라기보다 죽은 아이다”의 출전은 1941년작 평론 ‘역사와 문학’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나 발전한다는 근대적 역사관의 모순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나왔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공회전과 동시에 발진할 수 있나?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즐겨 쓰지만, 일단 일어난 일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음을 우리들은 가슴에 새기고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 … 역사는 결코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아쉬워하는 것이다. 역사는 인류의 거대한 원한이다. 역사를 시종일관 떠받쳐 온 것은 애석한 마음이지, 결코 인과의 사슬이 아니다. … 엄마에게 역사적 사실이란 아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언제, 어디서, 어떠한 원인과 조건 아래서 일어났는가만이 아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을 잃게 되었다는 감정이 동반되지 않으면, 역사는 사실로서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실증은 엄마에게 아주 불확실한 것이다.”(188쪽)
애정과 실증은 양립하기 어렵다. 사랑은 역사의 객관성과 대립한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은 쉽게 사실이 되고 믿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그렇지 않다. 사랑하면 현실 수용이 어렵다. 평생을 그렇게 사는 이들도 있다. 인간의 앎의 시작은 투사와 희망이어서 비극은 믿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사랑하는 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면 혼자 가슴에 칼로 새길 만큼의 감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니 엄마에게(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모든 이들에게) 역사적 사실은 아이의 죽음이 아니라 죽은 아이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 아이의 죽음을 수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 고유한 과정을 우리는 고통이라 부른다. 고통은 개별적이기 때문에 역사는 반복되지 않으며 발전이나 후퇴라는 개념도 가능하지 않다. “이 세상에는 똑같은 돌이나 나무는 하나도 없지만, 이 말 자체도 있을 수 없다.”(25쪽) 언어 또한 저마다 소리와 색깔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세월호의 일부 여론 중 “순수하지 않은 유가족” 운운의 근거는 자격지심, 적반하장, 무지, 저(低)인간성 중 하나다. 의사한 잠수부와 자살한 교감 선생님을 포함, 이 사건에서 300명 넘는 이들이 무고하게 죽었다. 유가족에 대한 인신공격도 어이없지만 그보다 더한 사실이 있다 해도, 현실과 무관하다. 경험하다시피 가족은 화목과 불화만으로 구별할 수 없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허물 많은 전쟁터다. 하지만 가족의 죽음이 주는 충격은 ‘같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만 진정한 피해자라는 논리만한 잔인성은 없다. 이는 사고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려는 행위다. 세상에 그런 피해자는 없기 때문이다. 유가족들은 이미 절망과 상실감, 후회, 죄책감 등 저마다 다양한 감정을 겪으면서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각자 자신과 싸우고 있다.
어떤 이들은 아이의 죽음을 계산한다. 그러나 죽은 아이는 사랑하는 이의 가슴속에 있다. 비록 원인 규명조차 가로막는 세력과 ‘세월호 피로감’이라는 최후의 발설까지 등장했지만 개인이 겪는 사랑의 고통이 역사를 만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 사건은 있었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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