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영 집필노동자
기득권의 언어를 의심하지 않는 사고의 빈곤함은 언어를 힘의 논리에 종속시킨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향한 ‘양보’ 요구, 한국을 방문한 교황에게 ‘중립’을 언급하는 태도, 모두 힘이 있는 쪽으로 치우친 결과다. 힘에게 복종함을 순리로 여긴다.
반면 비리와 연루된 국회의원을 비호하기 위해 다수의 동료가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는 뻔뻔함을 보자. 얼마나 뻔뻔한지 “비난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한다. 국민에게 비난을 받더라도 특권을 놓을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기득권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뭉치는 힘은 이토록 강력하다.
“의병은 왜놈들 몰아내자 카는 기고, 또 하나는 도적질 해묵고 나라 팔아묵을라 카는 벼슬아치들을 치자 카는 긴데, 그기이 다 똑같은 긴데 와 동학당은 나쁘다 카고 의병을 옳다 캅니까?”
<토지>에서 윤보가 김훈장에게 묻는다. 윤보는 물론 답을 알고 있다. “똑같은 일이라 캐도 상놈이 하믄 불충이고 양반이 하믄 충성이라 그 말씸입니까?”
‘상놈’의 입장에서 보면 도적질하여 나라 팔아먹는 벼슬아치는 나라에 쳐들어오는 왜놈과 마찬가지로 몰아내야 할 착취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계급의 규율을 따르지 않으면 무례하고 불충으로 여긴다. 신분제가 폐지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특권층의 권력 남용은 시민의 권리보다 막강한 힘을 가진다. 법조인의 전관예우, 국회의원의 불체포 특권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지만 세월호 참사 유족들은 진상 규명을 요구할 ‘당연한’ 권리마저 조롱당한다. 가족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예의까지 갖추라는 말을 들으니 출세하지 못하면 계속 억울해야 하나?
흔히 우리(한국)는 전통적으로 ‘예’를 소중히 여겨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윗사람을 섬기는 도리와 인간에 대한 예의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다. 전통적 예의라고 생각(착각)하는 많은 경우는 사실 전자다. ‘이게 어디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나 도지사인데’ 등은 모두 상대에게 예의를 강요하는 무례한 언사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 할 수 있는 것은 복종만 남게 만드는 천박함이다. 아이가 어른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학생이 선생에게, 사회적 신분이 낮은 이가 높은 이에게 지켜야 할 ‘도리’가 한 인간에 대한 ‘존중’보다 우선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상황에 따라 희생자, 피해자, 약자, 소수자, 아랫사람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에게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물론이고 같은 약자조차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양보와 중립을 요구하고 희생된 사람들에게 또 희생하라고 한다. 약자, ‘힘없음’은 비윤리이며 적극적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약자와의 분리, 힘과의 동일시는 이 사회를 끌고 가는 강력한 사상이다. 강자의 ‘특’권은 존중해야 할 권리로 여기면서 참사 피해자를 비롯한 약자의 권리는 이기적 투정으로 취급하는 이러한 권리에 대한 이중잣대, 이는 예의가 아니라 상스러움이다.
힘이 윤리를 지배한다. 약자는 욕망을 좌절시키도록, 일상에서 늘 조심하도록, 권리를 포기하도록 강요받는 존재다. 그래서 약자다. 특권에 대한 관대함과 약자의 권리에 대한 야박함이 공존한다. 상스러움이 넘쳐흐른다.
중립을 지킨다는 말은 방관이나 침묵이 아니라 치우침이 없어야 하고 극단에 서지 않겠다는 뜻이다. 코끼리와 개미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다면 코끼리 무게만큼 개미에게 ‘편파적으로’ 힘을 실어줘야 한다. 극단적으로 치우친 힘의 불균형 속에서 중립이란, 가장 명징하고 적극적으로 힘의 이동을 위해 ‘실천하고 있는’ 상태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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