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올해 초 파주로 이사한 우리 부부는 주말마다 동네 곳곳 명소를 찾아내며 쏠쏠한 재미를 찾고 있다. 지난여름에 알게 된 소담한 손만두집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정갈하고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손만두도 좋았지만, 가게 기둥에 걸려 있는 커다란 포스터는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그렇게 주인 내외와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파주주민밴드모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2014년 4월16일의 비극 이후 모인 파주 주민이 지금까지 300여명을 헤아린다. 그저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제 발로 찾아온 사람들이다. 주민들은 동네 공원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매주 거리와 전철역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았다. 주민들의 이름이 적힌 노란 펼침막을 제작해 도로에 매달기도 했다.
이들은 이번 10월3일에 시작된 파주출판단지의 ‘파주북소리’ 축제에도 참가했다. 부스를 마련해 노란 리본과 노란 풍선을 나눠주었다. 아이들이 든 노란 풍선이 북소리 축제를 가득 메웠다. 함께 출판단지 퍼레이드 행사를 벌이기도 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조만간 파주 북쪽 끝 문산에서부터 남쪽 끝 운정까지 416명이 4.16㎞씩을 나눠 걸으면서 서명도 받고 특별법 제정의 취지도 알릴 예정이다.
모임에는 사회운동가 출신도 있지만 주부, 동네 가게 사장님, 퇴직 교사처럼 지극히 평범한 분들도 많다. 대다수는 세월호 이후 그저 미안한 마음에 참가한 사람들이다. 잊지 않기 위해 할 일을 찾다가 우연히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이다. 생활협동조합, 육아공동체, 마을신문과 도서관 등등, 맑은 눈으로 돌아보면 ‘뭐라도 해야겠다’는 건강한 움직임들이 여기저기서 꿈틀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불신의 시절이다. 의회는 정치적 뇌사 상태에 빠져 있다. 청와대는 국민과의 대결 의지를 드높이고 있다. 두 곳 다 국민들의 손으로 뽑은 자칭 종들이 모인 곳이다. 종들이 주권자들 앞에서 태업은 물론 겁박까지 하고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자연스레 이런 종들을 뽑은 국민들의 자격을 의심하는 시선이 늘어난다. 이른바 국민이 개××라는 ‘국개론’이다. 속상한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국민의 자격을 따지는 건 원래 기득권자들의 몫이고, 파시스트들의 특기다. 민주주의는 자격 없는 민중, 데모스들이 자격 넘치는 엘리트들의 자격을 따지는 체제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데모크라시란 데모스가 크라토스를, 즉 민중이 힘을 갖는 체제다. 민주주의는 데모스가 자신을 데모스로 구성하고 힘을 행사하는 만큼 존재한다. 그러니까 중앙정치냐, 지역정치냐가 쟁점은 아니다. 중앙정치에서 답이 보이지 않으니 지역으로 눈을 돌리자는 식으로 접근해서도 안 된다. 어디서건 민중이 스스로 민중임을 자각하고 나서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파주주민밴드모임은 이미 세월호 이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주민공동체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두어 차례 오프모임을 했고, 공부모임도 시작했다. 형편과 사정은 제각기 달라도 전국 이곳저곳에 수많은 종류의 주민모임들이 있다. 어쩌면 없는 곳을 찾기가 더 어려울지 모른다. 독자들께서도 눈을 밝혀 찾아보시길. 왕정에선 왕이 정치를 하고, 귀족정에선 귀족이 정치를 한다면, 민주정에서 정치를 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내 몸은 편한 채로 직업정치인들이 알아서 잘해주길 바란다면 민주주의라는 체제는 불가능하다. 대답은 멀리 있지 않다. 내 옆의 동네 사람들이 비빌 언덕이다. 서로 비빌 언덕이 되자.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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