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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학자가 필요하다 / 이유진

등록 2014-10-12 18:42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유진 문화부 기자
절창이었다. 여러 문인들이 세월호 관련 글을 발표했다. 소설가 박민규는 직시(直視)를 주문했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 진은영은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고 썼다. 이들의 글을 실은 계간지는 발간 한달 만에 초판이 매진됐고, 출판사는 아예 이런 글만 따로 묶어 <눈먼 자들의 국가>를 펴냈다. 지은이들은 인세를, 출판사는 매출 전액을 세월호 문제 해결에 쓰기로 했다. 이 또한 일주일 만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생각지도 못한 대참사를 누군가 대신 표현하고 분석해주길 갈구하는 마음들이 적잖아 보인다.

연구자들도 ‘세월호 분석’에 일찌감치 착수했다. 며칠 전 진보정의연구소와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가 연 세월호 관련 집담회에서 들은 말이 기억에 남는다. “공동체에 기여하지 않은 죽음은 ‘희생’이 아니라 ‘비극’에 머문다.”(곽영빈) ‘애도의 자격’을 획득하는 희생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국가에 보탬이 되지 않고 “놀러 가다 죽은 것”은 희생이 아닌 사고사로 처리된다.

‘국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국가는 원래 책임지지 않는 것’이라고 답하는 이들도 있다. 무책임한 냉소다. 근대 국가란 모름지기 나라가 ‘국민의 집’이 되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국민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책무를 지기로 하면서 만들어진 것 아닌가? 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국민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금붙이를 팔아가며 나라를 구하겠다고 버선발로 나섰지만, 국가는 국민의 구조 요청에 ‘네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 ‘네가 얼마나 가난한지 밝히라’고 먼저 요구했다. 기본적인 호혜조차 없으니 ‘국가’가 뭐냐고 묻는 질문이야말로 정당하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사회학자 김덕영은 한국을 “허약한 국가”라고 했다. 근대화의 핵심인 사회 각 기능의 분화와 개인화가 진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했기 때문에 사회 각 분야는 합리성을 얻지 못했고, 가부장적 국가와 조직에 버림받은 개인은 혼자 눈물을 삼켜야 했다. 우리가 피로한 이유는 세월호가 아니라 삶 때문이다. 각 분야가 합리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궁하면 자기가 알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신자유주의 물결이 밀려오기 전부터 이미 한국은 구성원들에게 ‘개인 책임’을 강력히 요구해왔던 게 아닐까? 국가의 든든한 보호 속에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삶을 꽃피워보지 못한 채, 왜 이렇게 어이없이 살다 생을 마쳐야 하는가?

지금까지 발생한 세월호와 관련된 모든 사건, 쏟아진 말들은 이제 학자들이 분석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야말로 ‘세월호 이후’를 이끌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가, 사회가, 개인이 무엇인지 끈질기게 파고들어 질문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자신이 무엇을 대변하고 재현해야 하는지 잊지 않고 기억하며 겸허하게 현장으로 책 속으로 파고들 사람이었으면 한다. 하지만 역시 경제적 관점이 가장 중요한 ‘위기의 대학’에서 이런 돈 안 되는 장기간의 연구가 가능할지 알 수 없다. 시민 프로젝트라도 가동해 오랜 시간 궁구할 연구자들을 지원해야 할까.

그림자처럼 길어진 우리의 수치심을 줄이려면 해는 높이 떠야 한다. 그때까지 시간을 두고 진득하게 ‘눈먼 자들의 국가’에 대한 분석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세월호 이전과 다른 삶, 그것이 다음 세대의 삶일지라도 절박한 심정으로 기다리겠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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