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사회’를 구상하는 라투슈가 “재평가, 재개념화, 재구성, 재지역화, 재분배, 감소(reduce), 재사용, 재활용”의 8가지 ‘다시’(再:re-)를 요구하며 10가지 구체안을 제시할 때 나도 생각을 고쳐야 했다. 이제는 “성장경제학을 생태경제학 안으로 흡수하는 일”을 고려해야 할 때로 보인 것이다.
일회용 대신 쓰기 시작한 수입 면도기의 날을 사러 마트에 갔다가 기이한 가격표로 황당해진 적이 있다. 본체와 날 6개 든 것이 날만 6개 있는 것보다 더 쌌다.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당연히 면도기와 날이 든 것을 샀고 한참 더 쓸 수 있을 면도기는 버렸다. 신도시의 새로 지은 주상복합 건물에서 산 지 10년이 넘자 인터폰, 변기, 현관문 열쇠가 고장나기 시작했다. 부속 한두개 바꾸든가 회로만 약간 손보면 될 것 같은데, 수리(A/S) 직원들은 이것들이 세트로 제작된 것이어서 통째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억울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몸통을 교체하면서 생각난 것이 시계였다. 아들이 취업 기념으로 선물한 일제 손목시계에서 쇠줄의 매듭 하나가 자꾸 떨어졌다. 몇차례 고치다가 아예 줄을 바꾸자고 했더니 시계와 줄이 한 세트로 제작되어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난감한 사태가 아마도 기술의 효율성을 위한 일관작업과 경영 유지를 위한 생산 지속 전략이겠다고 이해하면서도, 조금만 손대면 더 쓸 수 있는 것들을 이렇게 마구 버려도 되는 건지 너무하다 싶은 불평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시계나 전기기구 수리점이 사라지고 있었고 내구재인 제품들과 가구들을 여차하면 소비재처럼 가볍게 폐기하는 풍조가 떠올랐다. 소크라테스가 시장 구경을 하다가 “세상에, 내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 이렇게 많다니” 하고 놀랐다지만, 백화점이나 마트를 다니다 보면 이 많은 팔리지 않는 상품들은 어떻게 처리될 건지 걱정되었다. 경제-경영학을 모르는 내게도 그 과생산, 과소비, 과재고 들이 결국 성장이란 이름으로 기업을 키우면서 자원 낭비를 재촉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내 은근한 걱정이 사사로운 기우가 아님을 최근의 몇 책에서 확인했다. 아마존에서 이북(전자책) 개발을 책임졌던 제이슨 머코스키는 <무엇으로 읽을 것인가>에서 스스로를 ‘전자책 전도사’라고 자부하면서 제작 기술을 소개하는 김에, “질레트 면도기는 한대 팔 때마다 손해를 보지만, 꼭 있어야 할 면도날은 한개 팔 때마다 작은 이익을 보았다”고 덧붙인 말로 내 첫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그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회사들은 기술적인 노후화를 염두에 두고 제품을 디자인한다. 내일 판매할 기기를 생산하면서 이미 그 기기를 대체할 상품을 연구한다”며 새로운 제품 생산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기업의 생리를 요약해준다. 그가 말한 ‘노후화’를 세르주 라투슈의 <낭비사회를 넘어서>의 역자는 ‘진부화’로 옮기는데, 미국식 주류경제학에 저항하는 프랑스의 이 경제학자도 부품이 아니라 물건 전부를 버려야 하는 사태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새 상품을 사도록 유도하는 이른바 구상품의 ‘진부화’를 세가지로 구분한다.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에 해당할, 기술 발전에 의해 기존 제품이 폐기되는 ‘기술적 진부화’, 디자인만 약간 바꾸고 새것이라며 광고와 유행에 태워 여전히 유용한 물건을 버리게 만드는 ‘심리적 진부화’, 인위적으로 수명을 제한하는 결함을 기술적으로 삽입하는 ‘계획적 진부화’가 그것이다. 그가 가장 문제 삼는 세번째의 의도된 진부화는 제작자가 애초부터 미리 특수한 장치로 고장이 나도록 설계해서, 가령 프린터가 1만8000장을 인쇄하면 탈이 나도록 한다는 것이 그런 예다. <성장 없는 번영>의 팀 잭슨은 “바로 경제 성장을 자극하기 위한 정책들이 경제 침체를 불러오는 것이어서 성장 그 자체가 시장을 붕괴시킨다”고 지적하는데 라투슈의 또 다른 책 <탈성장사회>는 더 나아가 성장을 지상의 과제로 제시하는 ‘경제’를 우리 의식의 뒷면으로 밀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성장’이란 명제는 곧 자원의 소멸, 그래서 지구의 파멸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 경고는 부족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돌조각 모아이를 숱하게 만들어 해변에 세우느라고 나무들을 남벌해 풍성했던 숲을 없애 자멸하고 만 이스터 섬의 운명을 떠올려준다.
1980년 미국 경제학자 줄리언 사이먼은 자원고갈을 우려하는 지식인들에 ‘분통이 나’ 내기를 걸었다. 스탠퍼드대학의 세 환경학자가 그 내기를 받아들여 구리, 주석 등 5가지 광물이 10년 후 그 값이 떨어지면 1만달러를 주기로 약속했다. 이 유명한 내기의 결과는 환경학자들의 패배였다. 비외른 롬보르의 <회의적 환경주의자>에서 이 대목을 읽을 때의 나는 근본주의자들의 환경보호론에 짜증을 내고 새로운 대체재의 개발과 생산 기술의 향상에 기대를 걸며 미래에 대한 낙관론에 편들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아무리 거대한 지구 덩치라 하더라도 자원은 분명 한계가 있는 것이고 엔트로피 이론은 일단 사용된 것은 재생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다. 팀 잭슨은 사이먼이 내기를 건 광물들을 “전세계가 미국이 소비하는 양만큼 소비한다면 20년도 안 되어 고갈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이먼의 내기가 더 장기에 걸친 것이었다면 낙관주의는 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성장과 발전의 지양을 요구하는 경제학자, 환경주의자들이 ‘행복한 사회’로 지목하며 대안으로 제시한 대상이 가령 ‘행복지수’를 개발한 부탄이나, 화석연료를 사용한 산업혁명 이전이라는 점에 대해 나는 찬성할 수 없었다. 근검한 생활이나 농촌의 자연적 삶으로의 복귀는 개인적 덕성으로 가능하겠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삶의 규모 축소나 생활방식의 퇴행을 요구할 수 없을뿐더러, 당장 정치지도자나 주류 경제학자들이 이런 제안을 하면 포퓰리즘의 함정에 빠지지 않더라도 분명 낙선되거나 무시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성장 우선주의와의 결별’을 주장하며 ‘탈성장사회’를 구상하는 라투슈가 2030년대의 자원고갈, 2040년대의 환경오염, 2070년대의 식량위기로 인류 문명의 파탄이 닥쳐오리라고 예상한 로마클럽의 경고에 대비하여 “재평가, 재개념화, 재구성, 재지역화, 재분배, 감소(reduce), 재사용, 재활용”의 8가지 ‘다시’(再:re-)를 요구하며 10가지 구체안을 제시할 때 나도 생각을 고쳐야 했다. ‘경제’란 말이 키워드로 회자된 것은 3세기도 안 되는 것이고, 이제는 “성장경제학을 생태경제학 안으로 흡수하는 일”을 심각히 고려해야 할 때로 보인 것이다.
머코스키는 전자책의 추세를 강조하면서도 종이책이 풍기는 향기를 무척 좋아하고 있다. 그는 전자책 ‘킨들’의 장래를 낙관하면서도 종이책으로 채운 자기 방을 ‘월든’이라고 자랑한다. 한문학자 정민 교수는 하버드 옌칭의 고서들을 뒤지는 바쁜 틈에 방문해 찍은 소로의 월든 집과 작은 묘비 사진을 보여주었다. “제주도로 유배된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릴 즈음 소로는 발을 뻗으면 발바닥이 벽에 닿을 지경의 작은 집에서 자연처럼 ‘단순하게, 단순하게’” 살았던 것이다. 그런 삶의 또 다른 모습을 작가 정연희는 소설 <치앙마이>에서 묘사한다. 타이의 이곳 사람들은 빌딩, 휴대폰, 성형외과 광고 없이, 그래서 속도감도 첨단문명도 없이, “정말 이런 세상도 있어”라고 감탄하게끔 자연스럽고 정답게 살고 있었다. 우리도 근래 청계천 복원, 고가도로 해체, 둘레길 조성, 한옥 마을 보존, 템플 스테이 등 자연친화적 시설들을 만들어 누리기 시작하고 있다. ‘방콕’의 와유(臥遊)를 즐기는 내 바람은 ‘성장 피로증후군’에 젖은 우리의 자연 회귀가 일상의 탈출에 의한 일시적 힐링의 효과에 멈추지 않고, ‘슬로 라이프’의 여유롭고 맑은 삶의 문화와 체제로 발전하는 것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김병익 문학평론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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