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펌으로 가는 버스 뒷좌석에 앉은 대머리 아저씨.’ 19세기 영국 언론인 월터 배젓이 가장 평범한 런던 시민을 표상한 문구다. 지금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지하철 ○호선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 ○○○씨’ 정도가 되겠다. 이 표현은 20세기 초 영국 법원의 판결문에 인용되면서 그 사회의 평균적인 ‘합리적 개인’을 일컫는 관용어가 된다. 누군가의 행위에 잘못이 있었는지 법적인 판단을 할 때, 이 합리적 개인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가 기준이 된다.
현실 세계에서는 평소 신중한 사람도 간혹 엉뚱한 행동을 하지만, 가상의 합리적 개인은 어느 순간에든 어떤 상황에서든 예견 가능한 위험에 대비하는 인물로 전제된다. 길을 걸을 때 하늘의 별을 쳐다보거나 명상에 젖다가 싱크홀에 빠지면, 그는 합리적 개인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 판교 테크노밸리 환풍구 붕괴 사고의 희생자들은 합리적 개인이 아니었을까.
영국의 한 법률가는 합리적 개인의 한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아킬레스의 용기도, 율리시스의 지혜도, 헤라클레스의 힘도, 천리안의 예지력도 지니지 않았다. 다만 경험이 주는 교훈을 늘 되새기는 사람일 뿐이다.” 사회적 경험과 주어진 정보에 비춰 충분한 주의력을 발휘하는 사람일 뿐, 모든 위험을 꿰뚫어보는 ‘완벽한 인간’은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세월호에 오른 승객이 선박 개조니 평형수니 고박장치니 하는 말들을 알 수나 있었을까. 돌출형 환풍구는 노상 밟고 다니던 인도의 환풍구에 견줘 강도가 5분의 1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형 사고와 관련해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졌다. 하지만 개인으로선 도저히 알 수 없던 위험 요소들이 연거푸 참사를 일으키는 이 시대에, 정말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정부의 총체적인 안전 대책부터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때로 하늘의 별을 보며 걷더라도 다칠 일 없는 세상을 원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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