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대학에 다닐 때 학비의 일부라도 벌 요량으로 액세서리 장사를 한 적이 있다. 동기는 단순했다. 친구의 언니가 액세서리를 팔아 등록금 마련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남대문에서 물건을 떼다 여고 앞에서 팔았다는데 들어보니 어려울 것도 없는 듯했다. 종잣돈으로 20만원을 들고 남대문으로 향했다. 머리 묶는 끈 종류가 그리 많은 줄 미처 몰랐다. 나는 예뻐 보이는 액세서리를 잔뜩 구입해 인근 여고에 자리를 잡았다. 그날, 온종일 머리핀 두 개 팔았다. 의정부여고까지 내려가 보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장사를 접기까지 한 달 걸렸다. 남은 물건은 과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공짜 선물을 받은 이들의 분석에 따르면 잡다하게 종류만 많고 ‘잇 아이템’이 없었다는 게 패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예를 들며 보여준 ‘잇 아이템’이 뭐가 예쁘다는 건지 나로서는 도통 납득하기 힘들었다.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서 남이 잘됐다니까 무턱대고 따라하는 건 망신의 지름길이라는 게 내가 얻은 유일한 깨달음이었다.
십년 전 책장사를 시작하고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하나는 내용이 좋다고 판매가 보장되진 않는다는 것과 이런 점을 악용해 출판사들이 자사 책을 되사들이는 편법을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줄곧, 이와 같은 책 사재기가 횡행하는 이유는 일차 출판사들의 잘못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취향이 없는’ 사람들이 베스트셀러라는 이유만으로 무턱대고 책을 구입해서라고 여겨 왔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사는 책은 나도 사고 싶다’는 것 역시 하나의 취향이라는 걸 인정하게 된 순간이 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나 자신만의 기준을 갖기가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 체감했을 때였다. 그것은 ‘베스트셀러 따위 읽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의 취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때문에 나처럼 사람들의 취향을 파악할 눈치가 없는 업자는 ‘내 취향대로 만드는 수밖에 없겠다’고 판단했다.
다소 마니아틱하다는 핀잔을 듣긴 하지만 나는 ‘내 취향대로’를 일종의 원칙으로 여기고 이를 고수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것은 내가 소신이 뚜렷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그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책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을 가졌다면 양상은 달랐을지 모르지만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내가 원하는 책을 만들 수 있었다. 거대한 담론을 다루고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이쪽저쪽 눈 돌리지 않고 한 분야에서 일관된 목록을 만들어 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여기고 혼자 뿌듯해하고 있다. 게다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좋아해 주는 독자들과 만나 어울리는 일이 즐겁다. 가능하면 오랫동안 이 일을 하고 싶다.
11월21일부터 시행되는 도서정가제로 인해 책이 더 안 팔릴 거라는 전망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할인판매로 서점마다 도서의 가격이 천차만별인 건 물론 부당하다. 하지만 그 부당은 어디까지나 업계 종사자들만 느끼는 부당일 뿐이다. 이런 사정을 이해해 줄 의무가 없는 독자들의 불신은 뿌리 깊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팔리면 힐링서를, <정의란 무엇인가>가 팔리면 하버드 관련 책을 너나없이 따라 내고 승부를 조작해가며 제 밥그릇만 챙긴 결과다. 이런 무취향의 출판이야말로 ‘다 같이 죽자’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즉효성이 없더라도 부화뇌동하지 말고 ‘제대로 된’ 책을 만드는 것 외에 대안이 있을까 싶다. 우리, 다 같이 살자.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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