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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전작권과 처가살이 / 박병수

등록 2014-10-26 18:43수정 2014-10-26 21:04

박병수 정치부 선임기자
박병수 정치부 선임기자
겉보리가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한다고 한다. 오죽하면 처가살이를 하겠는가. 지난해 전시 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재연기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이 속담이 다시 떠올랐다. 남 나라에 맡긴 전쟁 지휘권을 찾아올 생각도 못하는 속사정이 뭘까. 딱한 일이다.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보다 40배나 크고, 한 해 군사비도 남쪽이 36배나 더 쓴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엄청난 격차다. 미국이 한국보다 경제력은 14배, 군사비는 19배밖에(?) 안 된다(국제전략문제연구소 2014년 군사균형보고서)고 하니, 세계 최강국과 한국의 격차보다도 훨씬 더 크다. 그런데도 아직 북한의 위협이 무서워 독자적인 작전지휘도 못하겠다고 한다. 아직 뭐가 부족한 걸까.

이번 한-미 안보협의회의(SCM) 합의로 전작권 전환 문제는 몇십년 전으로 후퇴한 느낌이다. 한국군의 능력이 갖춰지고 주변 환경이 좋아지면 그때 전작권을 환수하겠다는 게 이번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의 합의 내용이니, 뭐라 포장해도 기약 없는 ‘시기상조론’의 화려한 부활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1987년 대선 때 작전통제권의 환수를 공약하고 실행하지 못한 논리가 시기상조론이었고, 1994년 김영삼 정부가 ‘평시 작전통제권’만 환수하며 전시 작전통제권에 대해 내세운 논리도 “아직 한국군의 능력이 안 된다”는 시기상조론이었으니, 하는 말이다. 기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2월 한-미가 전작권 전환 시점을 2012년 4월로 합의할 때 이를 반대하던 핵심 논리도 ‘시기’를 미리 정할 게 아니고 ‘조건’을 따져서 전환해야 한다는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이었다.

정부가 내세운 전작권 재연기의 핵심 이유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다. 대량파괴무기는 심각한 안보 위협이니,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게 전작권 전환과 무슨 상관인가. 미국은 핵우산을 포함한 확장억제력을 제공한다고 여러차례 공약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 불안하니 전작권을 ‘인계철선’ 삼아 미군을 붙들어 매야만 안심할 수 있다는 논리라면, 전작권 전환은 영영 불가능하다. 정부는 2020년대 중반까지 킬체인과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체제를 구축하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처할 수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지, 그건 그때 가봐야 안다.

국방부는 미국이 애초 전작권 전환 재연기를 내켜하지 않았으나 합리적으로 설득한 끝에 이번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번 일을 그렇게 ‘성과’로 포장한다면 정말 유감이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아시아 중시 전략인 이른바 ‘재균형 정책’을 채택한 이후 변화를 겪고 있다. ‘9·11 테러’ 이후 냉전시대의 낡은 개념이라며 사실상 폐기했던 ‘지정학적 위협’이 다시 거론되고 있고, 한-미-일 3각 군사협력은 중국 견제 및 동북아 패권 유지의 기본 축으로, 한국은 이를 위한 전초기지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과거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작권을 기꺼이 한국에 넘겨주려던 미국이 이젠 아니다. 미국이 전작권 전환 재연기에, 그것도 사실상 무기 연기에 선뜻 합의한 배경에는 이미 이런 정책 변화가 깔려 있다. 더욱이 최근 한국이 너무 중국과 가까워진다는 의심을 하는 미국 입장에서 전작권은 한국을 견제할 수 있는 카드 구실도 할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기 아니었을까.

처가살이의 기준이 꼭 ‘겉보리 서말’은 아니다. 그거 없어도 독립하는 이들이 있고, 있어도 처가살이를 계속하는 이들도 있다. 나라의 안보 문제를 꼭 처가살이와 견줄 수는 없다. 그러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박병수 정치부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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