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카카오톡 사태의 기저에, 기술철학의 오랜 고민이 있다. 기술은 도구일 뿐인가, 아니면 자율적으로 진화하는 시스템인가. 기술이 사회를 결정하는가, 혹은 사회가 기술을 결정하는가. 정보통신기술과 민주주의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으며, 점차 복잡해지는 기술의 전문화 과정 속에서 엔지니어의 사회적 지위와 책임은 무엇인가.
김규항은 카카오톡 사태에 대한 이재웅의 발언을 예수의 겨자씨 비유로 꾸짖었다. 요약하자면 정치적 자유 덕분에 정보기술(IT) 산업의 부흥이 가능했으니, 옛 민주화운동 세력을 탓하지 말라는 것이다. 민주화와 기술발전의 인과관계는 단정짓기 어렵다. 사실 기술이 민주주의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한국인 모두가 금속활자를 만든 무명의 장인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지는 않는다.
특이한 점은 김규항이 아이티 산업 자본가를 진보의 적으로 설정하는 논리다. 그는 “진보라는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나 안철수를 시대의 지도자로 떠받드는” 사태에 대해 탄식하며, 아이티도 다른 산업처럼 철학이 아닌 이윤을 추구할 뿐이므로, 숭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윤 대신 추구해야 하는 대상이 철학이라면 그건 좀 문제다. 모두가 철학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누가 소를 키울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개심은 그의 기술비관론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티 산업은) 인간의 삶을 훨씬 더 각박하고 공허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적정한 속도와 최소한의 여백을 소거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랍의 봄’에서 적정한 속도란 트위트가 전파되는 속도였고, 냉장고와 세탁기는 최소한의 여백을 지워 아이와 여성의 복지를 진전시켰다. 모든 것이 이처럼 맥락의존적인데, <예수전>의 작가는 너무도 단정적이다. 개인의 취향은 존중하지만, 근거 없이 취향을 강요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자신의 취향이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태도는 권위주의로 변질된다. 나는 한국 진보지식인들에게 나타나는 이런 근거 없는 우월의식을 ‘인문학적 제어론’이라 부른다.
인문학이 더 윤리적이라는 발상은 어디에 근거를 두는가? 공학은 비윤리적인가? 엔지니어는 인문학자에 비해 윤리적으로 천박한가? 왜 우리 사회는 엔지니어의 윤리의식을 하등한 것으로 취급하는가? 과연 한국 사회의 엔지니어들이 자기 직업의 주인으로 성장할 기회가 있었는가? 아니라면 그 구조적 원인은 무엇인가? 왜 한국의 엔지니어들은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가?
기술을 도구로만 바라볼 때 인문학적 제어론이 나타난다. 그 속에서 엔지니어는 감정 없는 부품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기술 자체가 정치적 표현의 공간이다. 그러한 정치적 공간을 건설하는 엔지니어의 정치의식이 하등할 리 없다. 민주화는 현실 정치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를 자신들의 대학 생활과 민주화 투쟁으로만 협소화시키려는 관점은 낡은 것이다. 엔지니어들도 자신의 공간에서 정치를 해왔고, 또 하고 있다.
진보진영 무기력의 기저엔 엔지니어 세력의 확장된 정치의식을 포용하지 못하는 옛 민주화세력의 권위주의도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혁명이 안단테로 이루어질지는 몰라도, 혁명이 구체적인 대안들로 채워지는 것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그 구체성의 중심에 엔지니어들이 있다. “책이 직접적인 탐색을 대신할 수는 없다.” 루이스 멈퍼드의 말이다. 무기력한 진보진영에 필요한 조언일 듯싶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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