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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유나야, 후회할 일 없을 거야 / 임범

등록 2014-11-03 18:43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나는 점을 본 적이 없다. 잘 안 믿어서다. 다만, 뭔가를 선택하는 데 외롭고 두려울 때가 있다. 아니면 이미 답이 나와 있는데, 그 길이 너무 힘들고 싫게 느껴질 때라고 할까. 친한 친구를 만나 떠든다. 내 친구들은, 내가 남의 말 잘 안 듣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대체로 그냥 들어준다. 엄살이든, 억지든, 떠들다 보면 스스로 정리가 된다. 친구의 표정이 보인다. ‘다 알고 있네.’ 결국 내 생각대로 선택한다. 그럼 그 친구는 아무것도 안 한 건가.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이상수 지음)라는 책을 봤다. 저자가 친구이기도 하지만, 내가 마침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어서 유심히 봤다. 주역 64괘 중에 ‘동인괘’에 이런 말이 나왔다. “교외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면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잘 아는 이들 말고, 스케일을 넓혀서 낯선 이들과 일을 도모하면 더 좋을 거라는 말일 텐데,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일이 잘될 것’, ‘성공할 것’이라고 하면 더 분명할 텐데….

저자 말로 ‘덕과 지혜’ 쌓기를 중시하는 주역의 괘풀이엔, 힘들더라도, 당장 잇속 챙기는 데 도움이 안 되더라도 올바르고 당당한 선택을 하라는 취지의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올바르고 당당한 선택을 했다가 일이 잘 안돼 손해를 봤다면 속 아프지 않을까.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은 그 선택에 대한 정신적 보상처럼 들리지 않는가. ‘이렇게 올바르고 당당한 선택을 하면, 나중에 손해를 봐도 당신은 후회하지 않을 거다.’ 고전의, 선인의 지혜를 빌려 이렇게 말해주는데, 이만한 위로와 격려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가 친구를 만나 혼자 떠들 때 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암묵적으로 오갔을 거다. “나 이렇게 결정해도 나중에 후회 안 하겠지?” “그래. 후회하지 않을 거야.”

드라마 <유나의 거리>를 재밌게 보고 있다. 최근 회에서 드디어 여자 주인공 유나가 남자 주인공 창만에게 고백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절묘했다. 유나는, 아버지가 소매치기로 감옥 가고 어머니는 어릴 때 집 나간 뒤 고아처럼 크면서 자신도 소매치기가 됐다. 창만도 고아처럼 컸지만 범죄와는 거리가 먼 건실한 청년이다. 둘이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사이에 있는 동안 유나의 어머니가, 대기업 회장의 부인이 돼 나타났다. 어머니는 유나에게 차 사주고, 아파트 사주고, 일자리 구해주면서 소매치기 친구들과 결별할 것을 요구한다. 유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소매치기 안 할 것을 맹세하는 동시에 친구들을 버릴 수 없다며 어머니와 결별한다. 그날 저녁 창만에게 말한다. “나 엄마랑 헤어졌어… 너 보고 싶어…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잇속을 버리고 올바르고 당당한 선택을 하고 나서, 자기 선택을 제일 먼저 알리고 동의를 구하고 싶은 사람. 아마, 유나와 창만 사이에 이런 말이 암묵적으로 흐르지 않았을까. “나 잘했지? 나 후회하지 않겠지?” “그래. 정말 잘했어. 후회할 일 없을 거야.” 이런 선택과 위로가 동반된 고백이, 여느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훌륭한 선물, 세련된 이벤트가 동반된 고백보다 훨씬 더 멋지게 다가왔다.

결정을 앞두고 나는 <운명 앞에서 주역…>이라는 책을, 친한 친구와 얘기하듯 읽으며 머리가 맑아졌다. 또 유나의 당당한 선택에 한껏 고무됐다. 하지만 아직 결정 못 했다. 역시 사람이 최고인 모양이다. 친구들 귀찮게 하는 수밖에.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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