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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독·소·일과 한·중·일 / 박병수

등록 2014-11-23 18:34

박병수 정치부 선임기자
박병수 정치부 선임기자
최근 2년 반 만에 이뤄진 중국과 일본의 정상회담을 보면서 거의 반사적으로 1939년 8월 독일-소련의 불가침조약을 떠올렸다. 이 조약 체결 소식에 깜짝 놀란 당시 일제의 곤혹스런 처지가 지금 우리의 외교적 상황에 투영되어서다.

일본은 1936년 11월 공산주의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나치 독일과 방공협정(또는 반코민테른 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이듬해 11월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까지 참여해 이른바 ‘추축국’ 성립의 기틀을 다졌는데, 갑자기 독-소 불가침조약이라니, 일본으로선 ‘낙동강 오리알’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과거사’를 매개로 대일 강경노선을 공유해온 건 잘 알려진 일이다. 언론에선 두 정상의 대일 노선을 ‘역사연대’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 주석이 갑작스럽게 아베 총리의 손을 잡았으니, 박 대통령의 외교적 처지가 딱하게 됐다.

전격적인 중-일 정상회담 개최에는 중국이 아펙(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담 주최국은 모든 참가국과 정상회담을 하는 관례를 무시할 수만은 없는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11월 부산에서 아펙 정상회담이 열릴 때도 한-일 관계가 험악해 한-일 정상회담을 하지 말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관례를 따르기로 결론을 낸 적이 있다고 한다. 실제 시 주석이 10일 중-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를 냉랭하게 대한 것이나, 두 나라가 정상회담 전 합의한 ‘관계개선 4대 원칙’의 해석을 놓고 최근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중-일 관계가 여전히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70여년 전 일제가 나치 독일의 ‘배신’에 보인 반응은 ‘그럼 우리도 소련과 손잡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1940년 5월 소련에 불가침조약을 제안했고, 결국 이듬해 4월 소-일 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소련이 독-소 불가침협정으로 서쪽 국경에 여유를 가짐에 따라 일본에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중국을 넘어 인도차이나로 전선을 확대하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북방의 안보위협을 그냥 두고 넘길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의 대응도 비슷해 보인다. 중국의 ‘표변’에 일본과의 관계 개선 쪽으로 달려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양자 교섭이 아니라 한-중-일 협력의 틀을 통한 우회 접근을 택했다는 것 정도다. 한-중-일 협력 체제는 3국간 갈등의 와중에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차관보급 회의’가 열리는 등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또 박 대통령은 지난 3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한-미-일 3국 정상회담 형식을 빌려 아베 총리와 대화 테이블에 앉은 전례도 있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들 한다. 한-일 관계를 이렇게 장기간 경색된 채로 방치할 순 없으니, 이번 일을 한-중-일 협력의 틀에서 한-일 관계를 모색할 기회로 삼는다면 전화위복일 수 있다. 그렇지만 중-일 관계 개선의 시간표에 허둥지둥 쫓기는 모습으로는 원칙도 잃고 실리도 내줄 공산이 크다. 그런데 중-일 정상회담 이후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를 만났을 때 과거 냉랭하게 대했던 태도에서 돌변해 갑자기 머리를 맞대고 “다양한 현안을 논의”(민경욱 청와대 대변인)하거나, 사흘 뒤 한-중-일 정상회담을 전격 제안한 사실에선 박 대통령의 초조함이 묻어나는 것 같다. 중심을 잃지 않는 전략적 판단이 필요하다.

사족 한마디. 일제를 당혹스럽게 한 독-소 불가침조약은 2년 뒤 나치의 소련 침공으로 휴지 조각이 됐고, 일-소 중립조약도 1945년 8월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없던 일이 됐다.

박병수 정치부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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