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1913년 완간한 <수학의 원리>에서 문명의 진보를 이렇게 정의했다. “사람이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고도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의 가짓수를 늘리는 것이다.”
일상생활에는 따분하지만 중요한 일들이 많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일들을 기계에 맡기고 신경을 덜 쓸수록 사람은 좀 더 심오하고 창조적인 일에 쏟을 시간이 많아지면서 문명의 진보가 이뤄진다고 봤다. 과학기술과 제도의 발달로 사람의 몸과 머리를 써야 하는 ‘허드렛일’은 100여년 전 화이트헤드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대폭 줄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100여년 동안 진보한 것인가?
현대 신경과학계에선 아니라는 대답이 더 많다. 사람 뇌의 활동력은 더 떨어지고, 문명의 이기에 대한 ‘안심 편향’이 작용해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정보에 쉽게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만과 과실로 비롯된 그릇된 행동을 반복해서 저지른다. 때로는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처럼 ‘체제적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의 고든 백스터 교수(컴퓨터공학)는 지난해 발표한 논문에서 전자금융거래 시스템이 금융시장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며, 금융산업 종사자들의 위기 대처 능력을 손상시키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황당한 예금 계좌 인출사건이 최근 농협에서 발생해 파문이 일고 있다. 전남 광양에 사는 한 50대 주부가 농협 통장에 넣어둔 1억2000만원이 지난 7월 초에 감쪽같이 사라졌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범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채 최근 1차 경찰 수사가 마무리됐다. 경찰이 확인한 것은, 중국발 인터넷 프로토콜(IP)에서 인터넷뱅킹과 텔레뱅킹 시스템을 통해 이씨의 계좌에 41차례에 걸쳐 접속이 이뤄지면서 돈이 증발했다는 것뿐이다. 명색이 정보통신(IT) 기술 수준이 세계 최강이라는 나라에서 그것도 대명천지에 벌어진 일이다. 세상은 늘 변화무쌍한 위험한 곳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박순빈 논설위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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