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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새누리의 누리 놀이 / 이유주현

등록 2014-11-30 19:02

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대통령의 공약을 지켜주기 위해 왜 야당이 이렇게 용을 써야 하지?’

지난 한달가량 2015년도 예산안 심사를 취재하다 의문이 들었다. 대통령이 공약했던 무상보육의 일환인 누리과정(3~5살 유치원·어린이집 통합교육) 예산을 국비로 편성해달라고 야당이 읍소하는 광경을 보면서다.

그동안 예산안을 놓고 여야가 대치할 때는 주로 여당이 추진하는 정책을 야당이 반대하거나, 야당과 여당이 각자 원하는 법안·예산을 놓고 맞바꿀 가능성이 있을 경우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엔 한해 4조원이 넘는 4대강 사업 예산, 관련 법안 때문에 여야가 몸싸움을 벌였다. 지난해 연말엔 막판에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안을 놓고 대치하다 상설특검·특별감찰관제 입법에 노력한다는 여당의 약속을 받고 야당이 물러섰다. 이번처럼 정부가 하고 싶은 일이 잘되도록 야당이 뛰어들어 돈을 따내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갈등은 여권의 무책임에서 비롯됐다. 기획재정부는 교육부가 누리과정 사업비로 요구했던 2조여원을 전액 삭감하고 이를 시·도교육청에 떠넘겼다. 대선 때 했던 약속을 지키긴 해야 하는데 돈은 부족하고, 그렇다고 없던 일로 하자니 욕먹겠고,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교육’이니까 시·도교육청이 알아서 하라고 하자, 이런 셈이었다. 이후 도미노게임처럼 진영싸움이 벌어졌다. 갑자기 폭탄을 떠안은 시·도교육감들이 누리과정 어린이집 예산 편성을 못하겠다고 드러눕자, 그렇잖아도 진보교육감의 무상급식 정책이 마음에 안 들었던 여권은 무상급식 할 돈으로 누리과정 하면 되지 않느냐고 윽박질렀다. ‘이건희 손자 급식 불가론’(이건희 회장 손자에게까지 공짜 밥 먹여야 하냐)이 재차 등장했다. 보수진영에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신혼부부에게 임대주택을 우선 공급하자고 포럼을 만든 것을 놓고 “이젠 집을 공짜로 줄 테냐”고 목소리를 높였다.(결과적으로, 이 포럼의 지향점은 ‘공짜주택’이 아니라 ‘임대주택’ 확보였음이 밝혀지긴 했으나, 정책의 구체성, 기획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비판은 여전히 남아 있다.)

흥미로운 일은 “학부모께 혼란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머리 숙여야 했을 여권이 누리과정을 ‘적반하장 전략’으로 백분 활용했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시·도교육청이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하면 나머지 일부를 국비로 지원하려고 했으나, 여당은 번번이 이를 비틀며 누리과정을 야당과의 예산 협상 지렛대로 활용했다. 새누리당은 다른 사업 예산으로 누리과정을 우회 지원하기로 합의한 뒤에도, 돈 액수를 놓고 합의-번복을 반복하며 꼼꼼하게 흥정했다. 약이 오른 야당은 “새누리당은 누리예산을 놀이예산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결과적으로 새누리당의 ‘누리 놀이’는 완승에 가까워 보인다. 법정 예산안 심사 기한(11월30일)이 지나면 예산안과 부수법안이 자동 부의되는 국회법 때문에 야당은 원체 협상 공간이 좁았다. 심사 기한을 이틀 앞두고 정의화 국회의장이 담배 관련 세법도 예산부수법안으로 지정하면서 야당의 협상력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터에, 담뱃값 인상분 2000원을 한푼도 깎지 못했다고 야당을 닦달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내년에도 누리예산 갖고 싸우는 일은 없어야겠다. 모순되는 법과 시행령, 소관 부처의 혼란을 정비하는 게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시·도교육청에 계속 빚을 내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니 부담을 떠맡을 주체들 사이에 합리적 조정이 이뤄져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는 어느 수준의 복지에 합의할 수 있는지,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한 것인지, 정직하게 얘기해야 한다.

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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