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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무너지는 ‘아카데미아’ / 이유진

등록 2014-12-07 18:52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유진 문화부 기자
학술 영역에서 2014년은 유럽 중세 암흑기를 보는 것 같았다. 중세 때 종교가 대학을 망쳤다면 지금은 자본이 대학을 망가뜨리고 있다. 대학을 시장 바닥으로 만드는 ‘경영자 총장’은 이제 흔해졌고, 더는 예전처럼 스타벅스의 학내 입점을 반대하며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기개 있는 학생도 없다.

지난 1월, 삼성이 올해 채용제도를 개편하면서 ‘총장 추천제’ 할당 인원을 각 대학에 전달한 것은 대자본의 대학 지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학교 서열화를 조장한다는 논란 끝에 계획은 유보됐지만, 기업의 오만함에 충격파가 만만찮았다.

교육부가 총장직선제 폐지를 압박하면서 봄부터 국립대에서는 저항과 순응이 맞부딪쳤다. 서울대는 법인화됐고, 총장 선출에서도 잡음이 터져나왔다. 연세대도 직선제 폐지 뒤 총장 전횡이 심각하다며 교수들이 크게 반발했다. 봉인이 풀린 캠퍼스에 자본의 진군을 알리는 불도저 소리가 요란했다. 대학들은 ‘취업도, 돈도 안 되는 학과’를 손질하고 나섰다. 5월, 중앙대 철학과에 다니던 김창인씨가 학과 통폐합에 맞서 싸우다 끝내 자퇴를 선언했다. 6월엔 참다못한 교수들이 고등교육의 위기를 돌파하자며 비장한 각오로 한국대학학회를 만들었다.

가을이 되자 고독하게 연구에만 몰두하기로 유명한 어느 대학교수가 학내의 비민주적 행태를 개선하려 나섰다가 상처 입고 두문불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각 대학에서 “불이익이 두려워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고 개탄하는 교수들이 적지 않았다. 연말엔 교수의 성추행이 잇따라 밝혀져 학계가 충격에 빠졌다.

우리 대학의 모습은 근현대사와 한쌍이다. 해방 직후부터 고등교육의 공공성이 자리잡을 틈이 없었다. 부자들의 돈이 사립대학 설립으로 쏠렸고 ‘비리 사학’이 속출했다. 군사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대학은 권력과 짝패를 이뤄 ‘교육 마피아’를 형성했다. 1987년 민주화의 결실로 총장직선제 같은 성과가 있었지만, 줄줄이 폐지됐다.

반성 없는 지식인들의 권력 친화적 속성도 문제일 것이다. 중세 유럽 대학은 잠시 자치를 누리는 듯했지만 교황청의 예속 아래 순응의 길을 걸었고,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반전이 생겼다. 이마누엘 칸트가 대학을 논하면서 ‘자유로운 이성’ 위에 ‘유용성’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자크 데리다는 나아가 대학은 어떤 경제적 목적이나 이해관계와도 무관한 연구·지식·진리추구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요시미 슌야, <대학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경우, 대학의 타율적 관성도 뿌리깊지만 사태를 여기까지 몰고 온 교육 당국의 책임이 가장 크다. 교육부의 허울 좋은 ‘대학구조개혁’ 정책은 부실 사학은 놔두고 정원 감축만 압박한다는 논란을 빚고 있다. 저항하는 교수들은 대학구조개혁 법안 폐기와 정부책임형 사립대 정책 도입 등을 촉구한다.

희망이 아예 없진 않다. 지난 6일 한국대학학회가 서울 동국대에서 연 학술대회에서 참석자들은 구성원 모두가 연대하는 대학공동체를 만들어 지금의 위기에 대응하자며 뜨겁게 공감했다고 한다. 대안을 찾으려는 움직임도 있다. 내년 1월 출범하는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은 2년제 과정으로, 커리큘럼 자체가 독립적인 시민을 탄생시키는 과정이다.

자유로운 사유와 엄격한 수련은 학문의 전제조건이다. 스승과 제자가 세상의 이해와 무관한 높은 경지에서 만나는 ‘아카데미아’는 그래서 철저히 보호되어야 한다. 자본과 정치권력이 개별 학자와 학생을 지배한다면, 삶을 진전시킬 지식을 생산하는 사회의 최전선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넋 놓고 있을 때가 가장 어둡다. 내년 부디 밝은 일출을 기대한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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