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제 남편, 혹시 완전체인가요?” 배우자의 평소 행동을 조곤조곤 적은 글은 이렇게 끝났다. 올라온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아 댓글은 100개를 넘어선다. “소름 돋았어요, 진짜 이런 분이 있구나.” “완전체 맞네요.” “한국 남자들이 어느 정도는 그런 면이 있지 않나요?” “남편분도 문제 있어 보이지만 님 대응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네요.”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종종 목격되는 장면이다.
원래 ‘완전체’는 긍정적인 단어다. 예를 들어 ‘완전체 엑소’라고 하면, 아이돌 그룹 엑소의 멤버 전원이 빠짐없이 모인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저런 게시판에서의 ‘완전체 남편’ 혹은 ‘완전체 시어머니’ 같은 말은 전혀 좋은 의미가 아니다. 상상할 수 있는 나쁜 특질을 빼놓지 않고 전부 가지고 있는 존재, 그게 바로 ‘완전체’다.
평범한 개인의 사적 체험들은 이제 인터넷 게시판은 물론, 방송에서도 각광받는 엔터테인먼트다. 특히 섹슈얼리티의 요소가 들어 있는 연애상담은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다. 물론 연애 이야기는 유사 이래 인류 최대의 화제이긴 하지만, 최근 연애상담 프로그램이 전성시대를 맞은 비결은 연애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자신의 연애담을 불특정 다수에게 전시하고 진단받는 그 형식 말이다.
왜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자신의 내밀한 사적 체험을 거침없이 드러내는가? 익명성을 일단 제쳐둔다면 크게 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첫째,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을 끝없이 축적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처럼 웹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관심이라는 자원을 놓고 맹목적일 정도로 경쟁하고 있다. 둘째, 이 주목경쟁에는 종종 사적 체험들이 동원되는데 무엇보다 그것은 개인이 선정적으로 활용하기 쉬운 자원이다. 셋째, 사적 체험의 전시에는 관심과 주목의 추구만이 아닌 다른 개인적 동기나 사회적 이유도 섞여 있다.
셋째 측면, 즉 자신의 체험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정말 궁금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사생활을 노출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타인의 판단과 조언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 내 남편이 ‘완전체’인지 아닌지, 여자친구가 ‘된장녀’인지 아닌지, ‘썸을 탄다’고 믿는 상대의 반응이 ‘그린 라이트’인지 아닌지에 대해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 판단을 구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건 기묘한 일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의 사적 체험이 사회 평균 또는 정상성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확인받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사적 체험의 매뉴얼화’다. 하지만 그런 매뉴얼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다. 삶은 제각각이기에 더 의미가 있는 게 아니던가.
문제는 “삶이 지닌 고유성과 개별성” 같은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별다른 울림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목가적인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장나버린 것이다. 오늘날 사적 영역은 개인의 역량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쇼룸’에 가까워졌다. 그 쇼룸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위계의 어디쯤에 자신이 놓이는지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주류적 가치에 밀착할 수 있도록 자아를 성형하는 일에 몰두한다.
한때 민주주의를 구원할 메시아로 여겨졌던 인터넷 공간은 이제 개인의 정상성을 판별하는 무허가 진료소로 전락했다. 삶의 단단한 버팀목을 찾을 수 없는 시대,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늘 불안하고 고통스럽다.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해서 망하는 건 아닐까?’ 내가 지금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건 그렇게 만드는 요인과 환경이 실재하기 때문이지 평균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느냐 여부와는 별 상관이 없다. 필요한 건 사적 체험의 매뉴얼화가 아니라 사적 체험의 공론화, 그리고 정치화다.
박권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