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아람 작가
“정의의 지연은 부정의 그 자체보다 해롭다. 정의를 지연시키는 행동이 바로 부정의다. 권리가 아예 없는 것과 권리가 아직 없는 것은 뭐가 다른가.”
필라델피아의 건립자이며 미국 의회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윌리엄 펜이 남긴 이 격언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의 구멍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된다. 주로 자명한 권리에 관한 법원의 판결, 정부의 집행, 의회 투표 등에서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기각 결정이 나올 때다. 생각해보면 보통선거, 주권 독립, 주 5일 노동제까지 우리가 쟁취한 당연의 권리는 단 하나도 빠짐없이 ‘시기상조의 시기’를 겪었다. 사실 시기상조의 논리야말로 권리의 도래를 막아온 가장 설득력 있고 위협적인 장애물이었다. 여전히 그렇지 않은가? 국가보안법 폐지는 왜 안 될까? 시기상조라서다. 주한미군 철수는? 역시 시기상조다. 통일과 대북관계 개선도 시기상조이고 모병제 전환도 시기상조이며 자본세의 도입도 시기상조다. 무상급식과 보편복지를 시기상조라 주장하는 목소리마저 여전히 강건하다. 주로 북유럽 국가와 대한민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차이를 강조하는 논리인데, 반복해서 듣다 보면 대한민국의 1인당 지디피가 북유럽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커다란 행운인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아마 우리가 무엇을 원하든, 손에 넣지 못했다면 그것이 시기상조이기 때문일 터다. 하지만 시기가 도래하여 무언가를 성취해본 적이 있긴 있었나? 역사를 통틀어 모든 시기는 성취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이 바로 적당한 시기’란 말이 거론되는 순간이야말로 영원히 시기상조다. 그 시기가 언제 스스로 찾아올 예정인지 누가 말해 달라.
민주주의 아래서 시기상조의 논리는 투표로 실현된다. 특히 만장일치가 요구될 때 그렇다.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의 시민 만장일치가 무산되었다는 이유로 아예 폐기해버린 서울시의 결정이 얼마나 흥미로운 모순을 품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마치 지난 선거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만장일치로 당선되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절반 가까운 서울시민이 박원순 시장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그의 당선이 시기상조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일 터다. 그러나 반대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박원순 시장의 발언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명백히 현존하는 세계의 양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투표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투표는 민주주의를 도피처로 삼는 것이나 다름없다. 올바른 논쟁이 시작되려면 올바른 번역이 우선되어야 한다. “겨울의 존재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아무런 문장값이 없다. 이 문장의 속뜻은 “나는 겨울이 싫다. 그것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이다.
만장일치 논리의 허구성은 반전 투표를 가정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성소수자 권리 조항 삽입이 만장일치 무산으로 폐기되었듯이, 성소수자 권리 조항의 폐기를 두고 투표한다면 만장일치에 이를 가능성이 없다. 만장일치라는 이름으로 의사결정 구조의 비대칭성을 정당화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민주주의적 자살이다. 우리가 진정 군사독재를 바라지 않는지 만장일치의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가? 동성애자의 권리가 만장일치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이성애자의 권리도 만장일치해야 존재하고, 여성의 권리도 만장일치해야 존재하고, 노동자의 권리도 만장일치해야 존재한다면, 민주적 권리는 모두 만장일치의 산물이어야 한다. 우리가 만장일치에 전적으로 기댄다면 세상에 남는 것은 딱 하나일 터다. 바로 만장일치 제도 그 자체다. 그런데 사실 만장일치 제도가 만장일치로 수용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여기 반대 한 표를 행사한다.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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