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전문적 법률 지식이 없는 나로선, 이처럼 법적 논리와 틀에 얽매이지 않아 직관적 이해가 가능한 선고문은 처음이었다. 19일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안창호·조용호 재판관이 낸 보충의견이 그랬다. “말과 글, 주장과 주의 속에서 도처에 숨겨진 함정과 그물에 방심하면 자칫 당하기 쉬운 것을 경계해야 한다”, “아주 작은 싹을 보고도 사태의 흐름을 알고 사태의 실마리를 보고 그 결과를 알아야 한다”는 ‘옛 성현들의 가르침’은 식탁에 앉아 듣는 아버지 말씀 같았다. 통합진보당이 주장하는 ‘1국가 2체제 2정부’의 위험성을 밝히기 위해 예멘을 예로 든 대목에선 지리·역사·문화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에 무릎을 쳤다. 남북으로 나뉘었던 예멘은 1990년 통일정부를 구성했다가 갈등이 불거져 결국 전쟁이 일어났고 북예멘의 승리로 통일됐다. 두 재판관은 “(예멘의) 역사적 경험에 비춰볼 때…(연방제든 단일국가든) 체제와 제도의 동질성이 먼저 회복돼야만 전쟁이 없는 평화통일이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수십년 지속된 암살과 테러, 만성적인 빈곤(세계은행 기준 2013년 1인당 국민소득 1330달러), 분리주의의 대두, 알카에다의 발흥 등으로 예멘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두 재판관은 ‘준비 없는 통일의 위험성’보다는 통합진보당의 주장대로 남북 두 체제를 인정한 채 통일이 됐다가 예멘처럼 나라가 박살나면 어쩌냐는 걱정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과연 통합진보당이 한국 사회를 주도 또는 전복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경기동부연합 합정동 회합에 나온 것처럼 수입 장난감 총을 개조하거나 손재주로 총기를 깎아 만드는 허술한 방법으로는 도무지 무장 능력을 갖출 수 없을 것 같다. 당 지지율이 1~2%인 통합진보당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을 가능성도 낮다. 새정치민주연합은 6·4 지방선거 때 통합진보당과 후보 단일화를 기피했고, 다음 선거에서도 손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대로라면 통합진보당은 다음 총선 때 1석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법무부가 과연 이걸 몰랐을까? 궁금증은 통합진보당을 보면 풀린다. 6·4 지방선거 참패 직후 당내에선 이석기 세력과의 공개적 절연, 지도부 사퇴 등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잠깐 나왔지만 곧 수그러들었다. 책임론은 “당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상황임에도 후보를 많이 내 선거를 무사히 치른 그 자체에 감격스럽고 대견해하는 분위기”(이상규 의원)에 묻혔다. 이들은 종북 논란에 대해 ‘사상의 다양성과 자유’를 주장할 뿐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은 적이 없다. 합정동 모임 사건이 터진 뒤에도, 당이 사라진 뒤에도, 그저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저항세력’으로 비장하게 단결했을 뿐이다. 정당해산 심판 청구 직후인 지난해 11월 ‘한국갤럽’ 조사에서 강제해산 찬성은 45%였으나 헌재 결정 이후 여러 여론조사에선 찬성이 60%를 넘었다. 지난 1년 동안 통합진보당은 삭발, 단식 등 힘겨운 투쟁을 벌였으나 여론은 더 싸늘하게 돌아섰다. 법무부가 노린 것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통합진보당의 쇄신 없는 단결, 그로 인한 고립 심화.
통합진보당과 선거연대를 했던 새정치연합에서도 내년 2·8 전당대회를 앞두고 “무원칙한 야권연대로 헌정질서를 문란하게 한 이들을 원내로 진입시킨 정치도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종북연대’라는 새누리당의 고전적 레토릭(수사)이 당내 경쟁 국면에서 서로에게 겨누는 칼날이 되고 있다.
공안정국을 기획·집행하는 이들에게 종북은 야권을 퇴행·위축·분열시키는 요모조모 쓸모있는 도구다. 통합진보당을 발본색원하려는 이들이야말로 종북주의자들이 멸절되면 곤란하다.
이유주현 정치부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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