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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싱크탱크 시각] 장그래처럼 버텨라 / 이현숙

등록 2014-12-28 18:58

이현숙 한겨레경제연구소장
이현숙 한겨레경제연구소장
대학 졸업 뒤 첫 직장에서 만난 20년 지기가 있다. 몇 년 전부터 진로교육에 관심을 갖고 자격증도 따며 대학원 공부도 했다. 올해 들어 관련 협회에서 만난 20여명과 사업자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숫자에 밝고 발 빠른 친구라 조합 이사가 되고 이사장 자리도 맡았다. 근데 세밑 송년모임에서 만난 이 친구가 하소연을 했다. 협동조합 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협동조합 이사장은 일은 죽어라 하면서도 활동비는 못 받고, 욕만 먹다 결국에는 문 닫는 역할을 하는 자리라는 자조 섞인 우스개까지 나돈단다.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 지 2년이 지났다. 전국에 6000개의 협동조합이 생길 정도로 양적으론 크게 늘었다. 물론 그 이전에 8개 특별법을 토대로 만들어진 농협, 수협, 신협, 소비자생협 등 5200여개의 ‘선배’ 협동조합이 있다. 기본법 시행으로 협동조합은 5명 이상이 모여 금융과 보험 업종을 뺀 모든 업종에서 만들 수 있게 되면서 그간 막혔던 물꼬가 트이게 된 것이다. 주요 업종은 도소매업, 농어업, 교육서비스, 제조 등이고, 유형별로는 사업자, 다중이해관계자, 직원, 소비자 등 다양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사업을 제대로 하는 곳은 많지 않다. 전체 설립 협동조합 가운데 등기와 사업자 등록을 마친 곳은 대략 4000곳이다. 사업을 제대로 시작한 곳은 2000곳에 미치지 못한다. 사업 아이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거나 내부갈등, 자본부족 등이 주된 이유로 꼽힌다.

어찌 보면 2년간 협동조합의 초라한 사업성적표는 예상했던 결과다. 경쟁과 효율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1인1표에 기초한 사람 중심의 결사체인 협동조합이 쉽게 뿌리내리긴 어렵다. 나와 같이 살아가고 나와 혜택을 나눠 가지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추구하면서 더불어 사는 능력이 우리에겐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제 대부분의 협동조합이 가장 힘든 점으로 ‘협동’을 꼽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럼에도 협동조합을 하면서 더불어 사는 능력을 만들어 나갈 수 있고, 우리 사회의 신뢰 자산도 쌓을 수 있다. 협동조합 틀에서 사람들은 함께 조직을 만들고 참여하는 절차를 거치며, 소통하면서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해 가는 과정을 배울 수 있다. <제로성장의 시대가 온다>에서 리처드 하인버그는 저성장 시대의 해법으로 협력과 연대의 중요성을 꼽았다. 그는 저성장 시대에는 기존의 성장 위주 방식이 작동하지 않기에 지역 공동체의 복원력을 높일 수 있는 협력의 경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인버그의 메시지처럼 저성장 시대에 협동조합은 중요한 경제주체가 될 것이다. 이미 협동조합은 세계경제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한다. 260만 협동조합에는 10억명의 조합원과 고객, 2억5000만개의 일자리가 있으며, 연매출 3조달러, 총자산은 200조달러에 이른다. 200년간의 협동조합 운동이 일궈낸 성과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그날 밤, 협동조합 이사장인 친구의 고민을 들으면서 결국 내가 한 말은 ‘버텨라’였다. 드라마 <미생>에서 오상식 차장이 회사를 떠나면서 장그래에게 한 말 역시 버텨라였다. 그리고 그는 ‘이겨내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대신 친구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는 지금은 미약하지만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다. 중국 작가 루쉰의 <고향>과 미국 시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서처럼 길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희망 역시 길처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협력과 연대로 희망은 생겨나고 그리고 그 희망이 또 다른 희망을 키워갈 수 있다.

이현숙 한겨레경제연구소장 hs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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